가을이 깊어갈 무렵이면 감의 고장 경북 청도는 온통 주홍빛으로 넘실댑니다. 마을은 물론 들과 산, 심지어 도로변까지 감빛으로 도배됩니다. 전체의 절반이 넘는 농가가 감농사를 짓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물이 들어 아끼던 옷을 버려야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감은 훌륭한 염색 소재이기도 하다는 걸 이곳에서 깨닫습니다. 청도에는 감염색 공방 10여 개가 밀집해 이맘때 감물로 천을 염색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트래블아이>의 미션입니다. ‘청도 천연염색공방에서 가을을 주홍빛으로 물들여라!’
청도지역이 주홍색 물결을 이루는 깊은 가을날, 화양읍 유등리 꼭두서니 감물염색전시장 어디에서나 감물로 천연염색을 한 천 말리기 작업을 쉽게 볼 수 있다.
“저기를 좀 봐. 감물로 염색한 천을 햇볕에 말리고 계셔.”
“마당 한가득 저렇게 감물 밴 광목이 빨랫줄에서 펄럭이는 장면은 청도의 또 다른 가을풍경이 아닐까?”
“맞아. 그런데 이곳은 또 달라. 저분처럼 소금물 뿌려주는 과정을 거듭하는 이유는 뭘까?”
청도군 전역에 천연염색 공방들이 즐비하다. 홍시가 무르익을 무렵 이곳 꼭두서니 감물염색전시장에 가면 감물들이기도 체험이 가능하다고.
“감물 입히는 횟수, 물을 뿌려주는 빈도에 따라 스무 가지도 넘는 색깔이 나옵니더.”
“아~ 그렇군요!”
“청도에서는 우리 천연염색 공방이 원조라예. 우리 대표가 원래 다른 사업하다가 요 근방에서 천연염색 시작한 게 벌써 십 수 년도 더 됐쟤 아마.”
천연염색으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꼭두서니 공방 주변으로 소소하게 놓인 하나하나가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건조장 옆 쪽밭까지…. 이 부지가 다 체험장으로 쓰이나 봐요?”
“맞심더! 10여 년 전만 해도 천연염색은 초창기라 꼭두서니가 대표적인 체험장으로 부상했지예.”
“전시실에서 내다보면 마치 별장과 같은 아늑한 모습을 하고 있네요!”
주민들의 구수한 모습은 체험장을 찾는 손님들을 편안하게 한다. 이중 느티나무 공방은 옻염색을 전문으로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데?
“안내하시는 분 말씀대로, 옻염색 과정에서 제직과 화공 등 섬유 계통에 30년이나 종사한 경력자들로부터 기술을 정말 배울 수가 있을까요? 상당히 고급기술일 텐데.”
“아니라예. 천연염색 기술을 함께 나누고 저변확대를 위해 천연염색 체험학습의 기회의 문을 이렇게 활짝 열어두고 있는 것도 우리 장점 아인교.”
실내 어디든 들어서면 벽장과 탁자에 진열된 완제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같은 재료는 다 어디에서 얻어지는 것일까?
“염색천으로 생활한복, 침구류, 커튼, 방석, 가방, 모자, 슬리퍼 버선, 토시, 식탁보, 속옷류, 카펫, 신발 등 못 만들 것이 없네요. 다 감물로만 이런 색이 나온 건가요?”
“감물뿐이 아니지예. 쪽과 치자, 애기똥풀, 꼭두서니, 자단목, 석류, 황토, 복숭아 가지, 쑥, 쇠뜨기, 밤 껍질 등 색감 내는 자연의 모든 것이 귀중한 재료라 안 합니꺼.”
이곳뿐 아니라 대구 종로에서도 꼭두서니 전문판매점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내 손으로 만든 염색천으로 가방이나 방석 등 아기자기한 용품이 탄생할 땐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짜잔~ 내 손에서 탄생한 식탁보! 정말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럽기까지 해요! 하지만 옆에서 다 도와주셔서 제가 만들었다고 말하기가 좀 멋쩍네요.”
“한 주에 한 번씩 개인교습도 하니까, 집 가까우면 들르고 해. 우리 체험 프로그램은 생쪽체험 7~9월, 쑥염색 6~8월, 감염색 5~12월에 가능하니 참고 하시고.”
감빛고을에서는 1200여 평의 넓은 공간에서 천연염색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특히 실에 염색을 하는 ‘사염’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라는데?
“사염? 그게 뭐죠?”
“말 그대로, 실에 염색하는 기라예. 단순해보여도 천연염색 단점은 극복하고 더 다양한 색상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이만한 게 없지예. 아, 결국 특허까지 획득했다 아입니꺼.”
“방법을 터득하려 2년 넘게 실험을 거쳤다는 게 바로 이거로군요!”
청도에는 다양한 감 관련 체험상품을 만나볼 수 있다. 그 중 감 따기는 단연 인기. 끝 부분에 가위가 달린 장비도 있지만 잠자리채 모양의 정겨운 옛 도구를 직접 활용해보자.
“이 반시를 봐. 청도에서만 볼 수 있지. 달콤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이 맛. 먹을 게 지천에 널린 요즘도 가을이 되면 그 옛날 할머니 체취가 묻어나는 홍시가 그립더라.”
“또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는구나. 하긴, 시골집에 가면 ”내 새끼들~“ 하시며 서리가 내린 뒤 딴 홍시를 대광주리에 그득 담아서 내어주셨지.”
추억의 계절 가을이면 감에 담긴 추억을 반추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은 풍요의 상징입니다. 주먹만 한 감이 가지가 부러질 듯 주렁주렁 열리면 저마다 오래된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쟁반처럼 납작하게 생긴 청도의 홍시가 반시(盤枾)로 불리듯, 청도에 가면 감에 대한 특별한 추억을 다시금 쌓고 올 수 있습니다. 이중 감물염색은 이 지역에서만 보고 또 체험할 수 있어 즐거움은 더욱 배가됩니다. 감 수확철 `청도반시축제`가 열리는 시점에 맞춰 꼭두서니로 색다른 추억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떠세요?
개는 어느 나라에서나 충성심 강하고 주인을 잘 따르는 영리한 동물로 여겨집니다. 주인을 해치려 한 짐승과 맞서 싸웠던 용감한 개부터 축음기에서 나오는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영리한 니퍼 등 외국 사례만 보더라도 개는 어느 동물보다 충성심이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주인을 잘 따르는 개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화가 전라북도 임실군으로부터 전해져옵니다. 주인 김개인의 생가, 오수의견공원, 오수의견문화제 등을 둘러보며 충직한 개 이야기에 빠져보는 색다른 경험, 바로 오늘의 <트래블아이> 미션입니다.
주인을 살린 개의 이야기는 임실군에서부터 유래됐다.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오수의견공원에 들르면 그 이야기가 좀 더 생생히 와닿게 된다.
“이게 바로 오수견 동상이로구나!”
“눈빛이 참 순하고 또 총명해보여요.”
“정말이네. 이 일대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김개인이라는 사람은 저 개를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폈을 거야. 어딜 가든 항상 데리고 다니며 벗과 같이 여겼으니까.”
몇 해 전 오수원 동산에서 발견된 비석 뒷면 개 그림이 우리 조상들의 사랑을 받았던 오수개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근처 개울물에 몸을 적셔 잠든 주인 곁으로 다가오는 불길을 향해 수차례 몸을 던졌던 이 충견은 그 후에 주인과 행복하게 살았겠죠?”
“그렇지 않아. 잠에서 깨어난 김개인은 이 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생을 다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이곳에 개를 위한 무덤을 만들어줬어.”
중국을 통하여 티베트 라사사원을 오고가던 뜻있는 스님들에 의하여 이 땅에 전번 되었다고 전해지는 오수개 조상. 그 기원을 찾는 과정들 역시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다.
“목축견 티베탄 마스티프와 가까운 혈연관계를 가진 소형 아우첸이 조상으로 알려져 있는 오수개는 그 혈연관계를 찾은 것부터가 신기해요.”
“오수개 연구 또한 ‘우리 것 찾기’의 일환으로 시작하게 됐어. 그렇게 본다면 이곳 오수지방에서 고려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충견’의 이야기는 엄청난 사료의 가치를 지니지.”
오수개 복원 큰 뜻을 두고 시작된 연구는 일반견종은 물론 다른 나라의 전통견까지 심층연구를 거치면서 일련의 성과를 얻게 됐다.
“오수개 연구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게 뭔지 아니?”
“글쎄요. 멸종한 개들의 유사성을 알아내기 위해 호남일대에서 살았던 신라시대의 삽살개의 흔적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을까요?”
“일본현지를 방문해 일본개의 보호 실태와 역사를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됐지.”
오수의견공원뿐 아니라 임실군에서는 매년 4월 말 열리는 ‘오수의견문화제’에서도 당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오수개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지만 임실에서 탄생한 사실은 저도 오늘에야 알게 됐어요.”
“이 지역과 관련된 오수개 설화를 알리기 위해 탄생한 게 바로 오수의견문화제지. 신라시대 주인을 위험에서 구하고 죽은 충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애견축제 등 이색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열린단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보자!”
고려 학자 최자의 <보한집>에서 통일신라 때 지사면 영천리에 살았다고 전하는 오수개의 주인 김개인의 생가 역시 잘 보전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문화제에서도 ‘김개인생가지터울림’이라는 행사가 있던데, 오수개의 충성심을 대외에 알리기 위해 이 집의 복원도 이루어진 거로군요.”
“맞아. 이곳은 목숨을 바친 충견의 마을과 지역 발전에도 도움을 주지만, 사람들에게 충과 의를 가르치는 산 교육장으로서 의미가 있지.”
주인은 당시 개의 충성심에 감탄하여 무덤을 만들어 묻어주고 그곳에 자신의 지팡이를 꽂아 두었는데, 놀랍게도 이 지팡이를 지금의 오수면 오수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55년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는 의견비예요.”
“과거 동네사람들이 개의 충성을 대대로 알리기 위해 의견비를 세웠다고 하나 그것은 현재 남아있지 않아. 대신 이 비를 다시 세운 거지. 가만, 이 나무가 바로 주인의 지팡이에서 유래된 ‘오수’로구나! 믿음과 의리가 사라져 가는 오늘날 깊은 여운과 감동을 전해주는 듯해.”
오수리에는 현존하는 망루 중 가장 높이를 자랑하는 오수망루가 마을을 지키는 버팀목처럼 서 있다. 이 건물 역시 오수개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데?
“철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육각의 각 면에는 구멍을 내어 사방을 둘러볼 수가 있어요. 사이렌을 울리던 스피커 2개도 있고.”
“등록문화제인 만큼이 이 오수망루는 역사성과 동시에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은 건축물이지. 자, 오수개 이야기가 이 마을에 어떠한 교훈을 심어줬는지 알 것 같니?”
외국 못지않게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지역견들이 있습니다. 남쪽에는 진도를 중심으로 진돗개가, 북쪽에는 호랑이도 잡는다는 풍산개가 있고, 비록 사라지고 볼 수 없지만 우리네 애환을 함께하며 한때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삽살개, 거제지방과 제주도에는 거제개와 제주개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 임실군에서 전해지는 오수개는 단지 전해지는 이야기에 불과해도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는 요즘 시대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줍니다. 임실군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오수견 이야기,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감동으로 다가왔나요?
작사가 반야월은 진주를 “비봉산 품에 안겨 남강이 꿈을 꾸는 내 고향”이라 노래했습니다. 이런 진주를 대표하는 명승지로 단연 진주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진주 남강을 따라 낮은 성곽을 두르고 있는 진주성은 이끼 낀 성돌만큼이나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간직한 곳입니다.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진주의 심장, 진주성을 느린 걸음으로 더듬어가다 보면 그 창대한 시간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을까요? ‘진주성에서 천년의 세월을 바라보라!’, 오늘 <트래블아이>가 던지는 미션입니다.
백제 때 토성으로 시작해 고려 말에 석성으로 축조했다는 진주성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홍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으로 불린 만큼 유서가 매우 깊다.
“숭례문이나 수원의 팔달문이나 모두가 성루만 남아 있어 날개 잃은 학처럼 외로워 보이지만, 이 공북문은 긴 성벽이 둘러처져 안온해 보여.”
“정말 진주성 성벽과 어우러진 자연의 모습은 안정적이고 대담하지? 이 성벽 따라 나 있는 1.2km 둘레길에는 연인, 사색 등의 테마별 산책로가 진주성 여행의 묘미를 배가시킬 거야.”
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다양한 문을 지난다. 성의 정문격인 공북문을 비롯해 촉석문 등 북쪽으로 난 여러 문을 지나면 보물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게 바로 영남포정사야. 1925년까지는 경남도청이 진주성 안에 있었으며 성내의 영남포정사는 도청이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문이다.
“성 안팎은 물론 성 바깥에 진을 친 병사들까지 지휘했던 문, 그래서 많은 성의 축성 모델이 되었다는 북장대도 내성 북쪽 끝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니 좀 더 가보자.”
1592년,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의 공을 새긴 김시민 장군 전공비도 이곳에 있다.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군사와 성민이 힘을 모아 왜군을 물리친 그의 공을 기리고 있어.”
“이 비문에는 1천명이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명의 대군을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왜군 2만을 3천800명 병사로 물리쳤다는 기록도 있지. 뭐, 사실이야 어찌됐든 그의 공은 인정받아 마땅해”
남강의 서쪽 절벽 위에 장엄하게 서있는 서장대는 김시민 장군이 서쪽 병사들을 호령하며 지휘하던 곳이다.
“진양호 쪽에서 성 쪽으로 들어오다가 이 장대를 바라보면 마치 당시 진주를 엄호하던 한 장수의 눈빛이 살아 전해지는 듯해.”
“특히 가을이면 절벽 위 장대 지붕의 목조 기와가 단풍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지?”
창렬사는 서기 1607년 경상도 순찰사 정사호가 창건한 사액사당으로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임진년과 계사년에 순국한 39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 사당은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데, 그 시작이 선조 때였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아무도 돌보는 이들이 없어 퇴락했다지?”
“맞아. 일제 당시 그것을 애석하게 여긴 진주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이곳을 중건해냈어.”
진주 8경 중 제1경을 자랑하는 촉석루는 벼랑 위에 높이 솟아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듯이 남강과 진주성, 의암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우아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지?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저 촉석루는 미국 CNN이 ‘한국 방문 시 꼭 가봐야 할 곳 50선’으로 꼽기도 했어.”
“그래? 하긴, 이 누각은 전란 시에는 지휘본부로 사용됐지만, 평상시에는 과거를 치르는 시험장으로 활용됐어. 이곳에서 얼마나 멋진 시조가 탄생했을지 감히 상상이 안 가.”
진주성 일대는 의기 논개가 분연히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그 한을 되갚은 충정의 장소로 기억되는 곳이다. 그러한 논개의 낙화는 촉석루에서 가장 잘 관찰된다.
“아깝게 쓰러져간 목숨들을 슬퍼하며 분루를 삼킨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이곳 의암에서 홀연히 몸을 던져 충정을 다했지. 이를 지켜본 촉석루는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크게 애통해했을 거야.”
“그래서 논개는 진주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걸 거야.”
촉석루 뒤편으로 가면 진주를 지킨 인물들을 기리는 의기사가 있다. 의기사는 촉석루, 의암과 함께 논개 이야기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시고 그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지?”
“맞아. 비단 바탕에 천연채색으로 된 정면 전신입상의 저 논개 영정이 사실 표준 영정으로 봉안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야. 논개 영정은 과거 한 시민단체가 친일파가 그린 것이라며 뜯겨져 나갔던 거야.”
10만 왜군과의 전투에서 무수히 많은 민관군이 목숨을 잃은 호국성지 진주성. 과거 왜군과의 치열했던 격전과 아픔을 뒤로 한 채 지금의 진주성은 그저 평화롭기만 합니다. 계절 따라 꽃이 피고 단풍이 지고 눈이 쌓이는 그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진주성은 이제 찾는 이들에게 지친 마음을 풀어놓은 듯 역사와 문화적 향취를 즐기는 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3대 승첩지인 이곳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는 건 여전히 진주의 심장을 더듬는 것과도 같음을 느낍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진주의 맥박과 숨결을 느낄 수 있었나요?
말 그대로 붉게 채색된 절벽, 깎아지른 듯 수직으로 치솟은 모습만도 웅장한데 길이도 범상치 않은 전남 화순의 적벽. 장장 7㎞인지라 눈을 아무리 멀리 가져가도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적벽 사이로 흐르는 강물은 또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가늠하기 어려운 적벽을 송두리째 투영시켜 그 크기가 배는 된 것 같습니다. 적벽 아래를 흘러가는 동복천은 그냥 보내기도 아쉬울 정도입니다. 오죽하면 김삿갓조차 이곳에서 유랑을 끝냈을까요? <트래블아이>가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유화 같은 풍경 화순적벽을 유랑하라!’
창랑천에는 약 7㎞에 걸쳐 화순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 물염적벽 등 크고 작은 절벽들이 있지만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유독 화순적벽을 찾았던 이유는 뭘까?
“화순적벽.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시간의 저편이라 마을 노인들의 기억 속에만 닫혀 있지. 하지만, 화순의 적벽은 한때 이 땅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명소였어.”
“호남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화순적벽, 중국 양쯔강변의 소상적벽을 연상케 해. 어디 그뿐인가? 소동파의 적벽부를 생각나게 하는 절경이야. 이 ‘적벽’이 조선시대 붙여진 거 아나?”
화순적벽과 맞은편의 보산적벽은 규모는 작지만 세월의 풍파를 지나 이제는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기에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희망의 길도 분명 있다는데?
“창랑적벽이나 물염적벽과 달리 화순적벽과 보산적벽은 안타깝게도 상수원보호구역 안에 위치해 일반인 출입이 금지돼 있구나.”
“보산적벽 위의 평평한 구릉에 보이는 저 망향정 보이지? 저 편백나무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네 슬픔이 조금은 가실 거야.”
그렇게 잠가놓은 화순적벽은 1년에 단 한 차례만 문을 연다. 수몰 실향민들이 모두 모여 고향 땅을 향해 제례 겸 잔치를 지내는 날이 그날이다. ‘조선 10경’을 볼 수 있을까?
“차단기를 지나 비포장길로 접어든지 꽤 됐는데… 어, 그렇지! 동복호의 맑은 물 위에 솟아있는 보산적벽 너머 검붉은 위용의 저것이 바로 화순적벽이지?”
“맞아! 까마득하게 수직으로 치솟은 적벽의 아득함. 아하, 이런 정도의 풍경이니 ‘조선 10경’으로 꼽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어.”
처자식을 떠나 ‘동가숙 서가식’하던 김삿갓은 34세 되던 때 처음 화순적벽을 마주했다. 이때만 해도 이곳에 뼈를 묻게 될 줄은 꿈에도 몰을 그의 첫 심경, 어떠했을까?
“화순적벽의 웅장함은 그 앞에 서보지 않은 이들은 짐작조차 하기 힘들 거야. 이 거대한 규모며 웅장한 기운. 글은 물론이거니와 사진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겠지.”
“맞아. 김삿갓도 화순적벽의 절경에 취해 걸음을 멈추었을 거야. 삿갓을 살짝 들고 화순적벽을 응시했겠지? 그리고 괴나리봇짐에서 지필묵을 꺼내 짤막한 시 한 수를 지었을 게야.”
백아산에서 발원한 동복천이 항아리 모양의 옹성산을 휘감아 돌면서 거대한 산수화를 그리고 있는 화순적벽. 하지만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하나 전해온다는데?
“조선 중종 때 유학자이자 개혁 정치가였던 조광조가 화순에서 사약을 받기 전에 25일 동안 배를 타고 다니며 화순적벽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한을 달랬다지.”
“어디 그뿐인가? 어쩌면 화순을 찾아가는 여정에서는 풍경보다는 실타래처럼 풀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더 안성맞춤일지도 몰라.”
화순에는 오래 묵은 역사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도 풍성하다. 그 중 가장 매혹적인 이야기는 단연 모후산 아래 절집 유마사에 얽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고.
“이 풍치림을 좀 봐! 유마사로 드는 길은 편백나무가 도열하는구나.”
“한때 호남지역에서 가장 큰 절집이었다지?”
“지금은 반들반들 윤이 나는 새것들로 가득하지만, 이곳을 한번은 찾아봐야 까닭은 전설 속의 여인 ‘보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 혹시 보안과 부전스님의 이야기를 알고 있니?”
물염적벽은 비단결 같은 강줄기와 주위 풍광을 감싸 안은 듯 포근하고 고색창연한 물염정이 압권이다. 물염정은 김삿갓이 즐겨 찾던 이 정자에 가면 뭔가 특별함이 있다는데?
“저 병풍처럼 깎아지른 기암괴석과 노송의 풍취를 좀 보게! 물염정에 앉아서 보니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고 티끌 하나 속됨 없이 살겠다는 이 정자의 뜻처럼 청정해이지 않나!”
“여기 정자 안도 좀 보라고! 김인후, 이식, 권필 등 조선 선비들이 지은 시문도 다닥다닥 붙어 있구먼! 여기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꽤 흥미진진해질 걸?”
화순적벽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망미정에 다다르면 정시룡 방랑생활부터 화순의 동북을 세 번 들른 김삿갓까지, 온갖 의문점에도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조선팔도를 두루 섭렵한 김삿갓이 하필 화순의 동복을 세 번이나 방문했을까? 동복의 구암리 마을 정시룡은 왜 사랑방을 제집 드나들 듯 하다 여기서 방랑생활을 마감했을까?”
“글쎄, 분명한 건 ‘내 집에 오는 손님을 반겨 맞으라’는 정씨 가문의 넉넉한 인심 때문만은 아닐 거야.”
호남 8경이자 조선 10경의 그 빼어난 전남 화순의 적벽을 둘러보는 여정이지만 쓸쓸할 수도 있습니다. 화순적벽 앞에서 ‘일반인 출입금지’ 조항에 발이 묶여버리는 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을볕에 반짝거리는 동복천과 그것을 비추는 적벽의 풍경은 마치 인상파 화가가 그린 두꺼운 유화작품처럼 여전히 다양한 색으로 현란합니다. 갈대와 억새에 가을볕이 부서지고, 물 건너편에는 온통 단풍이 불붙어 수면에 물그림자를 찍어냅니다. 어디라고 딱히 짚을 것도 없이 화순의 적벽에서 만나는 풍경이 모두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팔공산의 등산객들은 저마다 하나의 소망이 있습니다. 등산을 위해 산길을 오르는 사람들도, 봉우리마다 산재한 불교 문화재를 찾는 사람들도. 그들은 끝내 소원 한 가지를 남겨둔 채 팔공산을 내려옵니다. 푸르게 보존 되고 있는 팔공산의 자연과 그 속에 자리한 채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세월을 흐르고 있는 불교문화재의 조화는 그 어느 곳 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질 것입니다. <트래블아이>의 오늘 미션은, ‘팔공산의 영험한 기운의 근원을 찾아내라!’입니다.
가장 높게 솟아 오른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펼쳐진 팔공산. 대구의 북서쪽을 둘러싸고는 그 정기를 뿜어내는 팔공산의 기운을 느껴보자.
“팔공산은 꼭 그곳에 올라가지 않아도 보이는 경치가 정말 대단하지. 주봉에서부터 길게 뻗어나가는 산줄기는 꼭 독수리의 날개만큼이나 웅장하단다.”
“그렇군요, 대구를 둘러싼 병풍이 되어서 대구를 지켜주는 듯한 느낌도 들어요. 게다가 두 개의 강이 만나는 자리에 있어 자연환경도 좋고, 등산을 하기에도 최고인 것 같아요.”
본래 ‘공산’이라 불리었던 팔공산은 많은 역사적 사건의 중요한 장소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험한 산세로 인해 군사적 요충지로 성벽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팔공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많았단다. 그만큼 이름에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을까?”
“음, 아마도 ‘공산’ 이라는 이름 앞에 숫자 8이 붙어있으니 8명의 인물을 기리기 위한 이름이 아니었을까요?”
자연공원, 교육원, 야영장, 케이블카 등 등산객들을 위한 위락시설이 갖추어진 팔공산. 험한 산새를 넘고 넘어야 만날 수 있었던 보물들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등산로가 정말 잘 정비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개발을 하면 자연환경이 훼손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대구시는 팔공산의 등산로를 한정적으로 제공하고, 문화재를 연결하는 고리로 할용하고 있단다. 여러 위락시설도 자연을 훼손하지 않도록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어.”
우리나라 불교의 성지답게 곳곳의 골짝마다, 봉우리마다 자리 한 약사불, 불상, 탑 등은 팔공산이 하나의 거대한 절로 느껴지게 할 정도다.
“팔공산 전체에 흩어져 있는 각각의 사찰이 가진 문화재와 보물들은 그 양이 정말 어마어마 하네요. 전부 다 관리하려면 엄청난 예산과 시간, 정성이 들겠죠?”
“그렇지. 하지만 귀중한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남겨져 전해 내려오는 팔공산의 보물들은 그만큼 관리를 받을 자격과 가치가 충분하단다! ”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있어 동화사라 불리는 이 사찰은 봉황의 둥지로 비교되기도 한다. 동화사에는 어떤 봉황의 흔적이 남아있을까?
“이 봉서루의 누각은 참 독특한 형태를 하고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계단 중간에 있는 이 돌들은 어떤 의미일까요?”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놓인 돌 두 개는 독특한 의미를 담고 일부러 놓인 것이라고 하더구나. 위에 올려진 저 둥근 돌이 꼭 새의 알처럼 보이지 않니?”
조선의 왕조와 깊은 인연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는 파계사에는 여전히 조선의 풍취가 물씬 풍긴다. 파계사와 조선왕조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안내판을 읽어보니 파계사와 영조의 탄생 설화가 적혀있어요. 영조의 어의가 발견되었다니, 이 전설이 사실처럼 느껴져요!”
“9개의 물줄기가 되어 흐르는 이 산의 좋은 기운이 모이는 파계사에서, 조선의 왕조의 기운고 합쳐서 좋은 일을 만들어 냈던 것이 아닐까?”
산꼭대기에 근엄한 인상을 한 부처가 가부좌를 튼 채 앉아있다. 그의 머리에 얹혀진 넓적한 바위는 꼭 조선시대 갓을 연상케한다.
“부처님 머리에 올려 진 저 넓적한 바위가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높은 산의 바위를 깎아 불상을 만들었을까요?”
“갓바위라고 더 많이 알려진 저 불상의 이름은 관봉석조여래좌상이란다. 신라시대 인현대사가 어머니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입시 시즌이면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갓바위. 그들은 저마다의 소원들 빌며 연신 갓바위를 향해 절을 올린다. 갓바위가 이루어준다는 단 하나의 소원, 과연 이루어질까?
“지성을 다해서 빌면, 갓바위 부처님이 한 가지의 소원들 들어준다고 하는구나. 어떤 소원을 빌고 싶니?”
“음, 글쎄요. 저는 이 팔공산이 잘 보존되어서 불교의 성지인 지금의 상황을 잘 유지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기를 빌고 싶어요!
“기특하구나. 그래, 우리 함께 팔공산의 미래를 위해서 기도하자.””
산이 높고 험하지만, 일반 등산객들은 돌계단을 이용해 쉽게 산을 오릅니다. 힘든 기색 없이 산 중턱의 휴식처에서 쉬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부처의 자비로움을 가득 전해 받은 듯이 평온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팔공산의 매력은 어느 방면에서도 떨어지는 점이 없을 정도입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팔공산이 여러분을 대하는 방식도 함께 달라질 것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처럼 자신의 심신을 다스리고 지성을 다해 갓바위의 영험함에 소망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경기도의 3대 도자기 엑스포 장소 중 한 곳인 광주. 궁중의 행사나 하사품, 외국 사신의 영접 등에 쓰이던 백자를 공급하던 지방일 뿐만 아니라, 임금의 음식을 담는 도자기까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광주에서 이천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달리다 보면 경기 세계 도자 비엔날레가 열리는 엑스포장과 장인들의 도예촌을 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도자 체험을 하러 광주에 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도자 공예는 정신을 가다듬는 데에도 으뜸이라고 하지요. <트래블아이>의 미션, ‘복을 담을 그릇을 만들어라!’
경기 세계 도자 비엔날레는 2년에 한 번씩, 한 달에 걸쳐 진행되는 대형 행사. 다른 축제와는 달리 진한 흙냄새가 풍겨오는 이곳은 풍경 또한 으뜸이다.
스팟:곤지암도자공원
“어, 도자기 축제라고 해서 초가집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완전히 달라요! 넓은 꽃밭도 있고, 분수 놀이터도 있네요? 아이들의 모습이 정말 즐거워 보여요!”
“그럼. 지금은 축제가 열리고 있지만, 평소에도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단다. 시설도 잘 정비되어 있고, 대규모의 야외 조각 공원도 갖추고 있어서 나들이 장소로도 좋은 곳이지.”
엑스포장 입구에서 방문객들을 환영하는 커다란 인형이 하나 있다. 그릇 모양의 얼굴에, 그릇 손잡이로 된 귀를 가진 이 인형은 사실 광주의 유명 인사라는데?
“하하, 저것 좀 보세요.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양이 정말 귀여워요. 달려가서 꼭 안아주고 싶은 걸요? 저 도자기 인형의 이름이 뭐예요?”
“토야라고 한단다. 이 이름의 뜻이 재미있는데, 흙의 근원인 땅을 나타내는 한자인 地를 土와 也로 풀어서 표현한 것이라고 해. 토야는 도자기 엑스포의 마스코트란다.”
광주 도자기 엑스포장 안에는 국내 유일의 조선 도자 전문 박물관이 있다. 광주에 남아 있는 도자 관련 유적은 물론, 각종 도자기들을 다 만나볼 수 있는 곳.
“다들 저 건물로 향하고 있어요! 저 안에 대체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길래?”
“들어가 보면 알겠지? 도자기 타일로 만들어진 계단이 아주 예쁘구나. 예술 작품을 밟고 올라가는 느낌이라, 조금 미안한 걸?”
“엑스포장 곳곳에서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요.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는데요?”
경기 도자 박물관의 1층에는 도자문화실이 있다. 도자기의 역사, 제작 기법과 재질 등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갖추고 있는 이곳은 도자기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 적격!
“그 버튼을 누르고 가마터 모형을 살펴보렴. 도자기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볼 수 있단다. 가마터 주변의 사람 모형이 마치 살아 움직일 것만 같구나!”
“와, 정말이네요. 도자기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이렇게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니, 처음 알았어요. 저도 빨리 저만의 도자기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도자기들에서 壽(수), 富(부), 康寧(강녕), 攸好德(유호덕), 考終命(고종명)의 오복(五福)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이상한데요? 아까부터 비슷한 한자들이 계속 눈에 들어와요. 도자기를 만든 사람은 제각각일 텐데, 왜 거기 쓰인 글자들은 같은 걸까요?”
“우리 조상들이 한결 같이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가 바로 오복이기 때문이야. 저 백자를 좀 보렴. 둥근 달덩이 같은 모양이 정말 아름답지 않니? 안에 복이 가득 담겨있을 것 같아.”
축제 때에는 흙 높이 쌓기, 토야 만들기, 물레 체험, 흙 놀이방 등 도자기가 되기 전의 흙을 만져 볼 수 있는 체험들이 가득하다. 도자기를 만들기 전, 흙과 친해져 볼까?
“저 아이들 좀 보세요! 온 몸에 흙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꼭 원시인 같아요!”
“가서 흙을 한 번 만져보렴. 저 흙이 바로 고령토란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니?”
“아, 미술 시간에 썼던 찰흙이랑 촉감이 비슷해요! 도자기 만들기에 자신감이 좀 생기는 것 같아요. 미술 시간에도 제가 제일 예쁜 찰흙 인형을 빚었거든요.”
도자기 체험장에서는 흙을 밟는 작업에서부터 가마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을 직접 즐길 수 있는데, 축제가 아닌 때에도 근처 도예공방에서 체험해 볼 수 있다.
“자, 드디어 네 손으로 도자기를 만들어 볼 시간이야. 네 동작 하나 하나가 도자기의 모양을 결정한단다. 우리 가족의 복을 비는 마음으로, 조심조심!”
“꼬막 밀기부터 힘이 드는데요? 만만한 일이 아니네요. 초보자인 제가 물레를 쓰기는 무리이니 고령토를 같은 굵기로 말아 쌓아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까요?”
즉석 도자 만들기 코너를 이용하면 두 시간 만에 완성된 도자기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집으로 도자기가 배달될 때까지 두근거리며 기다려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드디어 글자를 새길 시간이 왔어요. 제 손을 좀 보세요. 고령토로 범벅이 되어버렸는데요? 하지만 시원하기도 하고, 말캉말캉한 것이 기분 좋은 감촉이네요.”
엑스포장 안의 공원에서 눈을 크게 뜬다면, “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사용되는 가장 소중한 무엇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만 뜨거운 가마의 불구덩이 속에서 끝끝내 살아남은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라는 정호승의 시 ‘항아리’의 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수 세기에 걸쳐 그래왔듯이, 도자기에 福을 담아 보세요. 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이 복을 담은 도자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오랜 기다림은 단순한 도자기 체험을 넘어서 마음의 성장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경남 김해에는 가야유적지 위에 아름다운 꽃과 봄향기 가득한 ‘가야사 누리길’이 있습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을 시작으로 국립김해박물관~연지공원~구지봉~수로왕비릉~동상재래시장~북문~수로왕릉 등 가야의 역사문화 유적지를 하나로 연결하는 이 길은 특히 봄이면 곳곳에 이팝나무, 은목서, 꽃사과, 조팝나무, 백철쭉, 비비추 등을 함께 보며 걸을 수 있어 더욱 좋습니다. 가야시대 찬란했던 유적을 탐방하면서 봄을 만끽하는 당일치기 여행, <트래블아이>가 제안하는 미션입니다.
수로왕릉역, 박물관역 등 이름만 봐도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한 김해 경전철역. 여기서 국립김해박물관이 곧바로 연결되기에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박물관 앞 광장에도 봄나들이객들이 굴렁쇠를 굴리며 뛰놀고 있어. 이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체험 프로그램의 하나인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그렇다면 우리도 본관 옆 가야누리관에서 직접 가야의 생활상을 체험한 후 본관에 전시된 가야문화유산을 둘러보는 게 좋겠다.”
김해박물관 뒤편에 있는 100년이 넘은 벚꽃나무도 호젓한 볼거리다. 하지만 이곳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더 제대로 된 여유와 휴식이 가능한 연지공원을 만날 수 있다.
“아직 파릇파릇한 새순이 돋지 않은 탓에 푸른 잔디를 볼 수 없어 조금 아쉽군.”
“이제 막 겨울의 문턱을 넘어섰는데 뭘 더 바라겠어. 겉옷을 벗어 던질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볕은 따습지?”
“앗, 저기 좀 봐! 호수 내 설치된 분수가 가동되기 시작했어!”
국립김해시박물관과 함께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도 가야민족을 상징하는 여러 전시물을 구경할 수 있다. 김해박물관 바로 옆에 대성동고분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가야인의 생활상과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변화된 삶을 담고 있군. 가야에서 김해로의 변천사와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기회였어.”
“아직 끝이 아니야. 이 박물관에서도 매월 가야토기 만들기, 청동거울 만들기, 가야무사 활쏘기 등 가야인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고 있대.”
김해박물관 뒤편으로는 작은 언덕이 하나 있다. 해발 200여m에 불과한 동산에 불과할 것 같지만 가야왕국 시조인 김수로왕 탄생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여기가 고대 국문학상 중요한 서사시인 ‘구지가(龜旨歌)’의 발상지라는 사실 알고 있니?”
“그렇다면 여기가 알속에서 수로왕 등 6가야 시조왕들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깃든 구지봉?”
“맞아. 동네 뒷산처럼 보이는 이 작은 동산이 역사적으로 국문학적으로 ‘구지가’의 산실인 만큼 탄강 설화와 함께 김해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평가되고 있지.”
구지봉에서 내려오다 보면, 이역만리 길을 떠나 영원한 사랑의 결실을 맺고 김해 땅에서 왕비가 되어 영원한 사랑의 화신으로 잠든 김수로왕비릉 앞에 발길이 멈출 것이다.
“허황옥 공주가 잠들어 있는 곳이야. 서역 땅에서부터 공주의 신분으로 길을 떠나 멀고도 험한 길을 걷고 또 걸어 마침내 김수로왕을 만난 공주의 이야기는 아직도 심금을 울려.”
“맞아. 그녀의 이야기는 2000년 전의 영원한 사랑의 화신이 되었고 지금까지 산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영원히 기억되겠지.”
이 가야사 역사탐방 코스에는 재래시장도 포함되어 있어 다소 의문이 들 수 있다. 김해재래시장(동상동)과 가야문화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가야정찬, 허왕후 만찬, 수로왕 만찬 같은 궁중음식들을 팔고 있을까?”
“아니야. 이 시장의 몇 십년 전통 음식점들은 약40년 전통을 가진 김해고유의 탁주 김해수로막걸리나 칼국수 같이 철저히 서민 위주의 음식을 팔고 있지.”
“그렇다면, 김해수로막걸리 맛 좀 보고 갈까?”
이번에는 분산성으로 가보자. 조선시대 김해와 부산을 왜적으로부터 지켜온 김해 읍성의 4대문 중 하나인 북문의 위풍당당한 자태를 발견하게 된다.
“높이 솟은 문루 아래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둥글게 쌓아둔 옹성이 보여.”
“김해읍성 중 북문이로구나. 양쪽에 날개처럼 쌓인 체성까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어. 조선 세종 때부터 김해와 부산의 왜적방어에 큰 몫을 했다지.”
“120년 만에 되살아난 김해읍성을 마주한 느낌은 어때?”
수로왕릉역 해반천 교량에 새겨진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은 김수로왕릉의 정문 납릉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상징적 의미가 담긴 걸까?
“이 납릉 문설주에도 두 마리 물고기가 있어! 허왕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까?”
“글쎄, 어찌됐든 이 두 마리 물고기처럼 허왕후와 수로왕은 높지도 낮지도 않게 서로를 마주 바라보면서 영원한 사랑을 이루었을 거야. 그 교화가 백성을 다스리는데도 일조했겠지?”
‘가락의 동쪽’이란 뜻을 가진 낙동강, 그 하구에 자리 잡은 김해는 2000년 전 금관가야의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1990년 대성동고분군 발굴을 통해 가야가 가장 철을 잘 다룬 국가였음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또 김해 땅의 흙과 낙동강의 물이 만나 이뤄낸 가야토기의 문화는 지금까지도 이어져오는 조선시대 민요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걷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가야의 전설이 깨어나는 가야사 누리길, 여러분은 걸어보셨나요?
부산 포구의 관문이라 불렸던 부산 부산진구의 서면 중심에 떡하니 세워진 부산탑에서는 부산 시민들의 굳은 자신감과 고향애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부산 직할시가 된 것을 기념해 세웠다고 하는 이 부산탑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것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모습이 꽤 인상적입니다. 부산진구가 부산의 중심임을 암시하는 듯한 부산탑의 모습을 보니 부산진구의 모든 것을 둘러보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오늘의 <트래블아이>미션은 '부산진구의 자신감 배우기!'입니다.
이미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부산 서면'. 젊음의 거리로 손꼽히는 이곳이 바로 부산 부산진구에 있었다. 그 곳은 그저 쇼핑의 거리가 아니라고 하는데?
“서면은 태화쥬디스를 중심으로 일대의 거리가 세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고 해. 또 사랑, 우정, 약속이라는 세 가지의 테마를 가지고 있다는데, 어디서 알 수 있을까?”
“아마 거리에 설치되어있는 조형물에서 알 수 있을 거야. 테마에 맞게 예술 활동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서면은 도심 속 활기찬 명소로 거듭나고 있어,”
부산의 심장부라고 불리는 부산 시민 공원은 자연적인 지형과 의미에 맞게 만들어진 공원이라고 해. 그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부산 시민공원의 경관은 꼭 대지의 예술을 보는 것 같아. 이 부지는 강의 끝단으로 축적되는 공간이라니, 도심 속 여유가 모인 공간이 된 것 같아.”
“ 이 공원은 최첨단 공원이라고 일컬어지는 데, 곡선으로 이루어진 경관이 인공적인 공원의 아쉬움을 덜어내어 주는 것 같아.”
성지곡이라 불리는 이 수원지는 영국식 댐이라고 한다. 맑은 물을 뽑아내어 제공하는 특색 있는 과정이 잘 보존되어 근대적 유물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수원지라고 하니, 이 건축 기술이 정말 놀라워.”
“등록문화재인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상수도원의 수원지이자 콘크리트 중력식 댐을 가지고 있다고 해. 서울의 상수도보다도 10년 이상 앞섰다고 하니, 그 가치를 알 수 있겠지?”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이 들어간 부드러운 반죽으로 뽑은 생면에 육수와 갖가지 야채가 어우러진 밀면은 부산진구의 특별한 별미이다.
“부산진구의 먹거리는 정말 독특한 것이 많은 것 같아. 특리 범천동에 위치한 낙지골목에서 먹은 낙지볶음은 정말 일품이었어.”
“서면의 음식거리에도 명물이 있어. 바로 칼국수거리지. 지금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 이름은 없어지지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
버드나무와 흰 사시나무가 많아하여 '백양산'이라 불리는 부산진구의 도심 속 산에는 특별한 문화 코스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주도에는 올레길, 지리산은 둘레길 이라면 부산은 나들숲길을 뽑을 수 있겠구나! 도심 외각이 아닌 한 가운데 위치한 고즈넉한 산이니 다녀가기도 쉬운 곳일 것 같아.”
“경사의 구분이 명확하고, 시간대도 미리 알려주는 형태로 제공되는 등산코스여서 미리 선택하고 간 관광객들은 무리 없이 부산의 자연을 즐길 수 있다고 해.”
화지공원에는 나이가 들어 허리가 굽은 듯한 배롱나무가 서있다. 하지만 그 모양에 비해 엄청난 크기의 나무는 국가에서 지정한 천연기념물이라고 한다.
“이 배롱나무가 이렇게 크게 자라있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이렇게 잘 자라고 오래된 나무이니 천연기념물이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
“하지만 오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야. 조상을 기리고 자손들의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뜻의 문화적인 가치까지도 함께 가지고 있어서 보존의 가치가 충분한 것이지.”
황령산의 고갯길을 구불구불 따라 올라가면, 어느새 탁 트인 경관의 봉수대를 만난다. 이곳에 남은 봉수대가 역사 속 이야기도 함께 들려준다.
“부산진구의 전경뿐만 아니라 저 멀리 보이는 광안대교와 부산항 까지 볼 수 있다니, 야경도 정말 대단하겠어.”
“그렇지 않아도 이곳은 밤에 찾아오기에 힘든 곳이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야경을 보기위해 황령산을 찾는다고 해.”
오래된 열차 하나가 철도위에 지친듯이 서있다. 아직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열차는 내구연한을 2배나 초과하여 달린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기관차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디젤전기기관차는 총 네 대인데, 지금은 이 한대만이 보존되고 있다고 해. 우리나라의 디젤전기기관차 시대의 개막을 알린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야.”
“한국 전쟁의 참전용사들과 가족이 이 기관차에 방문한 뒤 세웠다고 하는 이 기념비가 문화유산으로의 의미를 한층 더해주는 것 같아.”
부산진구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수물자가 모두 쏟아진 부산항에 인접해 있습니다. 그로인해 부산의 중심에 피난민들을 비롯해 중소기업, 대기업까지 몰려들면서 이곳은 부산의 교통,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거듭났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그러한 전통은 부산진구에 온다면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산에서 가장 활기찬 되인 부산진구! 여러분은 부산의 중심지인 이곳에서 그들의 문화, 전통, 역사 그리고 젊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자신감을 배워가고 싶지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