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취직이 결정되어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기뻐하는 내 곁에서 어머니는 ‘왜 굳이 서울이냐’는 말만을 반복하셨다. 취업난이 얼마나 심각한데. 엄마가 뭘 몰라서 그렇다며 짜증을 내는 통에, 어머니와 나의 이별은 그리 아름다운 모양새가 아니었다.
이삿짐을 싸고 있는 내게 어머니가 책 한 권을 건네셨다. 귀퉁이가 다 닳고 너덜너덜해진 책. 우리 집처럼, 낡고 또 낡았다.
“이런 건 또 왜요. 가져가 봐야 읽지도 않을 텐데.”
“너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인데 기억 안 나니? 어젯밤에 읽어봤는데 재미있더라. 일하다 지치면 한 번씩 들여다 봐.”
나는 그 책을 꼬박 오 년이 지난 오늘에야 다시 발견했다. 오 년 동안 쉼 없이 일한 결과, 직급도 연봉도 높아졌다. 직장에서 사십 분이 걸리는 대학가의 자취방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떨어진 원룸 촌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 가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자주 전화를 드리지도 않았다. 먼 지방의 지역 번호를 누르는 것이 싫었다. 이유는 그 뿐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행복이라는 것을 좀처럼 느낄 수가 없었다. 아침 일곱 시 반에 일어나 회사에 가서, 하루 종일 엇비슷한 서류들 사이에서 머리를 싸맸다. 나를 괴롭히는 상사도 없었고, 딱히 사이가 나쁘다 할 만한 동료들도 없었으며, 매일 점심을 같이 먹을 정도로 친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바쁘게 사는 것이 좋았다. 얼굴을 본 지도 몇 년이 지난 친구들을 굳이 불러내어 맥주를 한 잔 하는 것이 귀찮았다. 통장에 쌓여가는 잔고들을 확인하며, 미래를 꿈꾸는 것이 좋았다.
헌데 그 미래라는 것이 참 묘했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좋은 사람을 만나, 아이들을 낳고 싶었다. 그러는 중에는 내 집을 가지기 위해 일을 할 것이다. 아침에는 조금 더 일찍 일어나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저녁에는 가계부를 정리할 것이다.
하루의 끝, 자진해서 야근을 하고 돌아오면 빈 부엌에서 무엇을 먹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뜨거운 물로 삼십 분도 넘게 샤워를 했다. 고단함이라는 것이 쉽게 씻겨 나가지 않았다.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러 본 지도 십 년이 넘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신 이후로 혼자 나를 키워 오셨다. 집안 살림이 넉넉한 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나날이 말라가셨다. 하지만 집에 웃음이 끊겼던 기억도 없다. 낡고 초라한 반지하의 빌라였지만, 어머니는 매일 내가 좋아하는 반찬 한 가지씩을 상에 올려 주셨다. 먼 곳에 가지는 못했지만, 저녁이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섰다. 길거리의 이름 모를 꽃들을 들여다보며 함께 웃었다. 컴퓨터를 사 주지는 못하셨지만, 헌 책방에서 한 달에 한두 권씩은 꼭 책을 사다 주셨다.
점심 즈음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와 내가 함께 살던 반지하의 빌라가 헐린다고 했다. 나는 ‘받은 돈으로 새 집을 구하면 되지. 혼자 살기에는 어차피 크잖아.’라고 대꾸하고 전화를 끊었었다. 그런데 그 낡은 책을 보자 문득, 그 구질구질한 집에서의 웃음소리가 그리워 진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첫 장을 펼쳤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라는 투박한 제목을 가진 그 책은, 어머니가 사다 주셨던 책 중의 한 권이었다. 땅보다 갯벌이 더 많은 바닷가였던 괭이부리말에는 고양이 섬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섬이 있었다고 한다. 갯벌도, 고양이섬도 바다가 메워지며 흔적을 감췄고, ‘괭이부리말’이라는 이름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고 한다.
책을 넘기며 나는 혼자 눈물을 훔쳤다. 책 속의 명희는 괭이부리말에서의 기억을 모두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는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명희가 10층짜리 아파트를 떠나 여전히 가난한 동네인 괭이부리말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도 명희는 지금 행복했다. 다 낡아빠진 숙자네 집 문 앞에 선 지금이 엘리베이터 자동문 앞에 섰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꼈다. 명희는 이제서야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책의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으며,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까똑”
이른 아침부터 머리맡에서 경박한 소리가 울렸다. 부스스 일어나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단풍 보러 가자.’
시계를 살펴보니 새벽 여섯시. 간만에 월차내고 늦잠 좀 자려는데 감히 내 단잠을 깨워? 무시하고 자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휴대폰을 발치에 던져놓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사정없이 벨소리가 울리고…….
“야, 새벽부터 왜 이래? 나랑 절교하고 싶냐?”
그때 전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흑흑흑, 정아야. 나 백현이랑 헤어졌어. 알고 보니 딴 여자 있더라. 죽여 버릴까?”
세상에서 제일 거추장스러운 동물이 ‘결별한 인간’이라더니……. 황금 같은 휴가 첫 날, 나는 결별한 인간 때문에 아침부터 백암산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백양사까지 가야해? 그냥 덕수궁 이런데서 단풍 보면 안 되냐?”
내 질문에 희진이는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으며 말했다.
“기분도 개판인데, 이왕 볼 거면 진풍경을 봐야지. 내가 백양사 단풍 싹 다 긁어모아다가 쌍계루 앞 연못에 뿌려버릴 거야. 이렇게라도 해야 속이 풀리겠어.”
그렇게 우리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백양사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16번 국도를 달렸다.
사실 현진이는 이미 작년에 백현과 백양사에 와 본적이 있다고 한다. 사진 좀 찍는다는 남자들이 11월만 되면 단풍 찍으러 이곳에 몰려든다는데……. 백현은 현진이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데려다 놓고, 자신은 이곳저곳에 렌즈를 들이밀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고 한다.
“백현이 사진 찍는 동안 넌 뭐했어?” 라고 물으니, 현진이가 뒷좌석에 있는 쇼핑백을 가리켰다. 쇼핑백 안에는 단풍잎을 붙여 만든 압화 액자가 들어 있었다. 연못에 비친 쌍계루와 단풍나무를 표현한듯했다. 단풍 빛깔이 좀 죽긴 했지만 봐줄만했다. 하지만 백현이 내버려둔 사이, 혼자 압화를 만들었을 현진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현진아, 잘 만들었네! 단풍축제에선 이런 것도 하는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진이 말했다.
“그거, 백양사 화장실에 버리고 올 거야.”
나는 백양사에 들어서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백양사 대웅전 뒤로 보이는 백암산이 절경이었다. 전체적으로 단풍이 붉게 타오르는 가운데, 이따금 보이는 노란빛, 푸른빛이 정말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백양사 단풍은 아기 손 마냥 크기가 작아 아기단풍이라 부른다던데, 작지만 새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촘촘히 모여 있어 밀도가 상당했다. 그래서 더욱 붉게 보이는 게 아닐까?
현진이는 백양사에 도착하면서부터 말이 없어졌다. 어딘가 불안한 모습이었다. 압화가 든 쇼핑백을 든 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한참을 걸었다. 나는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지만, 현진이 걸음에 맞춰 걷다보니 구경할 새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현진이 걸음을 멈췄다. 현진이의 압화 그림에서 보던 쌍계루 연못 앞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연못에 비친 쌍계루의 고즈넉한 모습과, 화려한 레이스처럼 쌍계루를 둘러싼 단풍들. 그리고 그 뒤에 물처럼 흐르는 백암산의 능선이 어우러져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수면에 비친 그 모습이 더더욱 몽환적이었다. 수면 위에 별처럼 떠오른 단풍과 연못에 비친 풍경이 겹쳐 이색적인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모네의 ‘수련 연못’ 그림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쌍계루의 모습을 찍기 보다는, 수면에 렌즈를 들이대고 있었다. 모두 뭐에 홀린 듯 집중한 모습이었다. 나 역시 카메라를 챙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연못에 휴대폰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었다.
한참이나 침묵으로 일관하던 현진이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 중에 백현씨 있는 것 같지 않아?”
현진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진 찍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백현은 보이지 않았다. 현진의 착각이었다. 현진은 백현을 잊고 싶은 게 아니라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정아야. 나 작년에 왔을 땐 단풍 보이지도 않았어. 같이 오긴 했었어도 계속 나 혼자였고, 눈으로 계속 백현이를 쫓느라 단풍을 볼 여유가 없었거든. 그런데 오늘 너랑 와서 보니까 백양사 단풍이 예쁜 걸 이제야 알겠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같이 와줘서 고마워.”
나는 현진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뺏었다.
“야, 이거 버릴 거면 나 줘. 멋있으니까 내가 가질게. 구질한 추억, 내가 처리해 주지 뭐. 여기 화장실에 버리면 단풍들도 슬퍼하지 않겠냐? 우리 연못 한 바퀴 돌고 단풍빵 먹으러 가자.”
“현진아. 흑흑흑…….”
새벽부터 피곤하긴 했어도, 현진이 때문에 좋은 구경 했다. 그나저나 이 단풍 압화는 내 방 어디에 걸지? 원빈 포스터 하나를 떼야 하나? 거 참. 좋은 친구 노릇하기 어렵다.
간장게장도 아닌 것이 금세 밥 한 공기를 뚝딱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내 학창시절 도시락반찬 단골메뉴 이기도 했다. 해산물이나 젓갈류를 유난히 좋아하는 나를 보고 우리가족은 누가 해안가에서 자란 아이 아니랄까봐 식성에서 본적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집은 보나마나 해안가로 가게 생겼다고 하였으나 정반대였다. 삶은 그렇게 가끔씩 엇나가는 맛이 있었다.
혼기가 꽉 들어차고 나서야 뒤늦게 선을 보았고 그마저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는 격으로 엄마의 친구들이나 교회 지인들에의해 무미건조한 선을 보게 되었고 그렇게 집안과 집안의 묵은 숙제거리를 해결하는 것처럼 의식이 치러졌다.
친정과 다소 먼 곳으로 시집을 가서일까 엄마는 결혼식 내내 눈물을 보이셨다. 식 전날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때만해도 속이 다 시원해서 껄껄껄 웃으면 어쩌냐고 했는데 눈물바람이다.
폐백을 할 때에 양가 부모님께서는 대추와 밤을 던져주면서 행복하게 잘 살라고 말씀해주셨다. 특히 시어머니는 아들가진 사람의 유세였을까?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에 그저 아이 이야기만 하실 뿐 행복하게 살라 던지의 말은 일절 없으셨다.
다행이 남편과의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다. 서로 나이를 먹어가는 동지애랄까. 연애결혼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고 서로가 생각했던 결혼의 이상향은 아니었겠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도란도란 살 수 있었다.
친정식구들의 입맛은 내가 젓갈을 좋아하는 것처럼 짜고 매운 것에 길들여져있었다. 같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소금이나 간장의 양이 달랐다. 시댁식구들은 대체로 싱겁고 가벼운 음식들로 먹었다. 나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으므로 간을 싱겁게 한다고 했음에도 시어머니께서는 늘 구박을 하셨다. 간 하나도 제대로 못 맞춘다고. 시어머니는 짠 음식에 대한 거부가 거의 경멸에 가까웠다. 내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친정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 엄마가 싸준 어리굴젓 한통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시어머니는 길길이 날뛰면서 식탁에 올릴 생각도 말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못된 생각이었지만 늙어서 보자는 생각으로 꾹꾹 참았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되어버렸다.
시어머니의 치매판정이었다. 점점 기억은 흐려지고 아이가 되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네가 시집살이 하나는 제대로 한다며 혀를 끌끌 찼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결혼을 탐탁지 않아했던 시부모와 한 집에서 사는 것도 요즘 사람들이라면 식겁할 일이었는데 그런 시어머니의 병수발이라니.
시어머니의 병세는 생각보다 진전이 빨랐다. 의사선생님께서는 기억이 흐려지면서 신경이 예민해져 신경질을 부릴 수도 있으니 가족들이 이해를 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정말 그랬다. 시어머니는 실제로 평소보다 더 잦은 신경질을 부렸다. 싱겁게 만들라고 했던 반찬들을 뒤엎으며 소금 가져오라고 소리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그래서 소금을 가져다 드리면 짠 것을 먹여 자기를 죽이려고 그런다고 욕설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아이 키우랴 집안 살림하랴 치매 노인 병수발까지하랴. 점점 기운이 빠졌다. 언젠가 시어머니가 바지에 실례를 했을 때 욕실에 시어머니를 앉혀두고 배설물로 뒤섞인 옷가지를 번갈아 보고 엉엉 운적이 있다. 시어머니는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울지 마. 내가 미안해.”
“우리 어머니 많이 변했네. 나한테 미안하단 말도 하고.”
“미안해. 내가 많이 속상했나보네. 우리 아가.”
어머니? 어머니!
시어머니의 눈빛은 여전히 총기가 없었다. 씻기 위해 발가벗고 욕조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어머니, 정말 많이 변했다. 나한테 아가라고도 해주고.”
“나 그거 먹고 싶다. 니가 맛있다고 했던 거.”
“아, 어리굴젓이요? 웬일이래. 얼른 씻고 따뜻한 밥에 어리굴젓하고 우리 밥 먹어요.”
오랜만이다. 시어머니와 마주하고 앉아 먹는 밥. 따뜻한 밥에 알싸하고 매콤한 어리굴젓 올려 입에 넣으니 숨통이 트인다.
대륙, 대륙, 그놈의 대륙. 친구들이 인터넷을 보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거슬렸다. 중국에서 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나를 겨냥하여 하는 말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조현아, 너도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내 이름은 홍조현. 다른 이름은 훙쭈셴. 주성치는 알지만 저우싱츠는 모르는 것처럼, 아이들도 홍조현이라는 이름만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한 때 청순 미녀로 이름을 날렸던 한 홍콩의 여배우의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지으셨다지만, 친구들에게 조현이란 그저 남자 같은 이름일 뿐이었다.
내 어머니의 이름은 이연경이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훙원줘다. 나는 중국인 2세다.
아버지를 본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셨다고만 하시고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으셨지만, 아마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불법체류자인 중국인과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친척들과 아무런 왕래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음이 분명하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그저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아버지가 미웠다. 어머니를 미혼모로 살게 하고, 나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든 것이 미웠다.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 한 적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내 기억이 시작 될 무렵부터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는 다 있는 아버지가 내게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아주 오랜만에 읽어 보게 된 것 뿐이다. 내게 아버지가 없는 이유가 아버지가 중국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한 달에 한 통 꼴로 도착하는 아버지의 편지를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서서 신발을 벗기가 무섭게 아버지의 편지를 건네는 어머니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머니 앞으로 온 편지에, 아버지가 다음 달 즈음에 한국에 오신다고 적혀있었다고 했다. 편지를 받아 든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바로 편지를 뜯어보지 못하고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가 나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저 얼떨떨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가 아직 글을 다 떼지 못했을 무렵에는 항상 어머니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편지를 읽어 주셨는데, 이제 보니 아버지는 아직도 한국말이 서툴렀다. 첫머리에 ‘사랑하는 나의 딸, 조현에게’라는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어린애 같은 글씨에 웃음이 나왔다.
문 밖에서 내 반응을 조심스레 살피시던 어머니가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내 몫의 편지들을 가져다 주셨다. 십여 년 어치의 편지들이 상자 안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네가 나중에라도 읽고 싶어질 것 같아 버리지 않고 놔뒀었어.”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대답이 나와 버렸다. 나는 거의 백 통 가까이 되는 그 편지들을 밤을 새워 읽었다. 단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 한 마디 쯤은 섞여 있을 줄 알았는데 백여 통의 편지에는 한결같은 말들이 적혀 있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라고.
그리고 오늘,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차이나타운을 찾았다. 오정희의 유명한 소설 <중국인 거리>의 배경이 되었던 바로 그 거리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중화가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의 거리였다.
지구상에서 공룡이 자취를 감추고 나서 사람들은 공룡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공룡 발자국이나 작은 흔적조차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한반도를 샅샅이 뒤졌다. 서양 박물관에 있을 법한 공룡의 큰 등뼈라도 발견하는 날이면 큰 경사가 난 것처럼 기뻐할 것이다.
엄마는 등이 굽어 마치 공룡의 뼈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다리는 홍학 모가지처럼 가늘었으며 흰 살갗은 점점 핑크빛으로 물들어 앙상한 가시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엄마는 등산을 즐겼다. 엄마말로는 얇아지는 다리에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했고 굽어가는 등을 펴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엄마의 다리는 점점 더 가늘어졌고 등은 점점 굽어 척추 뼈가 훤히 들어날 정도였다.
엄마의 목소리만큼은 공룡의 소리처럼 우렁찼다. 마치 큰 화산이 분출하며 용암을 쏟아 내는 것과 같았다. 다 키운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겠다며 무등산 자락 아래에서 보리밥을 파신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수다를 떨고 있으면 다 먹었으면 그만 가라고 손님들을 매몰차게 내 보낼 때도 있었고 반찬 좀 더 달라고 하면 손이랑 발이 없냐며 직접 가져다 먹으라고 호통이었다. 손님들은 그런 엄마를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저 친근한 옆집 이모쯤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무등산을 즐겨 탔다. 나도 엄마를 따라 무등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쩍쩍하고 갈라진 돌병풍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엄마가 떠올랐다. 네모나게 갈라진 돌들이 엄마의 굽은 등 사이로 보이는 뼈와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이 돌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를 보았을 것이다. 이 사람들도 엄마를 보고 공룡과 같다고 생각했을까? 무등산의 주상절리와 같다고 신기해하는 것일까? 그래서 엄마의 호통을 기분나빠하지 않고 웃어넘기는 것일까?
엄마에게 식당일을 그만두라고 한 적이 있다. 그것도 주방일과 서빙, 카운터까지 일하는 아줌마도 두지 않은 채 혼자 운영하신다. 반찬으로 나가는 나물이나 김치, 음식부터 막걸리와 동동주까지 직접 담그시기 때문에 하나하나 따지자면 엄마는 1인 기업자나 다름없었다. 자식들이 용돈도 섭섭지 않게 주고 생일이나 어버이날, 명절 등 때가 되면 특급 수당인 양 용돈도 특별히 더 챙겨 드리는데 왜 힘든 일을 고집해서 해야 하는 것이냐고 따져 물은 적이 있다. 돈이 그렇게 좋으냐며 공룡이 발톱을 세우듯 날을 세워 엄마에게 말한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소리소리 지르며 노여워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먼저 산에 오르자고 말한 적이 있다. 함께 오르자고 해놓고 저만치 혼자 걷고 있다. 저렇게 얇고 가녀린 다리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매일 무등산 정기를 받아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저만치 떨어져 걷는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 같이 가자고 말을 꺼냈다. 엄마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엄마는 산이 그렇게 좋아? 그래서 그렇게 억척스럽게 산 아래 삶을 고집하느냐고. 그냥 산책 겸 올라갔다 내려오면 좀 좋아?”
“그런 말 마. 공룡이 왜 사라진 줄 알어? 그게 다 퇴화돼서 그러는 거야.”
“퇴화가 되었다고? 공룡이? 엄마는 무슨.”
“진짜래도? 퇴화돼서 쓸모없이 사라지기 싫어. 쓸 수 있을 때 열심히 쓰는 거지. 이 몸뚱이도 그렇고.”
엄마 자신도 얇아져가는 다리와 굽어가는 등이 못내 신경이 쓰였나보다. 당신의 몸이 점차 사라져가고 굳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으리라는 발버둥이었다. 그것을 헤아리지 못한 나는 엄마의 굽은 등을 말없이 매만질 뿐이었다.
바람은 쉽게 그칠 줄 몰랐다. 딸애가 겨우내 입으라고 옷을 사왔다. 남편 것이랑 내 것 두 개다. 나는 받아들자마자 대뜸 ‘어디꺼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딸애는 비싼 거야, 됏수? 이런다. 비싼 거란다. 하기야 어디꺼냐고 묻는 말에 비싼 거라고 돌아온 대답이 썩 틀린 대답도 아니었다. 손주들을 마치 대단한 선물인양 품에 쥐어주고는 이제 틈만 나면 아이들을 맡기고 저들끼리 하하 호호다. 물론 손주 새끼들 안 예쁜 노인네야 없겠지만 저들 하는 짓이 얄미워 그런다.
남편과 나는 일찍이 정년퇴임을 마치고 그야말로 까마득할 줄 알았던 노년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조용한 걸음으로 가까운 예배당에 나가 자식들 안녕을 바라고 오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일도 없다. 손주들을 봐줄 때면 꼭 당부하는 말이 있다. 과자 사달라고 해도 사주지 말고 꼭 사달라고 떼쓰면 유기농과자 사 먹여라, 비디오테이프 틀어주지 말고 책 읽게 해라, 당근은 잘 안 먹으니 곱게 다져 티 안 나게 먹여라. 별 유난을 다 떤다고 비웃으며 나는 너 그렇게 안 키웠다고 하면 이를 바드득 갈며 그래서 자기가 이런 거라며 대든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인다. 염색 좀 하란다.
“엄마, 제발 염색 좀 할 수 없어? 진짜 할머니 같애.”
“그럼 내가 할머니지 아가씨게? 그리고 너도 곧 늙어 이것아.”
“누가 나는 안 늙는대? 그러니까 곱게 티 안 나게 최대한 안 늙어 보이게 살라는 거지.”
늙으면 늙는 거지 최대한 안 늙어 보이게 늙는 건 또 뭐람. 그리고 염색약 한 번 사다 준 적 없는 것이 매번 말로만이다.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딸애다. 딸애의 전화를 받으며 무심코 식탁에 놓인 달력을 보니 오늘이 5월 8일이다. 다른 때 같으면 나가서 밥한 끼 먹고 여느 때보다 두둑한 용돈이 담긴 흰 봉투 하나면 끝이더니 이번엔 무슨 일인지 가족야유회를 가잔다. 내가 억새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나. 지나간 말로 흘린 적이 있었는데 김 서방이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침부터 김밥이다 유부초밥이다 바리바리 싸왔는데 딸애 가족은 캐릭터 돗자리에 유기농 과자, 유기농 과일이다. 김 서방은 웃으면서 하나 드셔 보라고 권했지만 딸애의 찌릿한 눈총에 됐다고 했다. 어느새 자기 둥지를 틀어 자기 새끼들만 돌보는 자식들을 볼 때면 언제 저렇게 컸나 싶다가도 젊은이들 상대로 피어오르는 질투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산 정상에 끝없이 펼쳐진 억새가 바람에 따라 한들한들 춤을 춘다. 흰색으로 보였다가도 금세 은빛을 띤다. 부스스 소리를 내며 일렁이는 억새를 보니 벌써 가을인가 싶다. 내 나이도 어느새 가을을 맞이했다.
꼿꼿하던 몸과 마음으로 살았던 2, 30대를 지나 점점 세월이 지나고 보니 스쳐 가는 바람에도 몸을 눕히는 60대가 되어버렸다. 손주가 은빛 억새를 보고 할머니 머리랑 똑같다고 깔깔거린다. 딸애는 거보라며 ‘진작 염색 좀 하지’란다.
난 이렇게 흰 아니 은빛 내 머리가 좋다. 늙는다는 것은 서러운 것도 슬픈 것도 아니니까. 그저 지나온 세월에 대한 정당함이라고 생각하니까. 늙음을 애써 감출 필요 뭐가 있을까. 바람에 흔들리듯 세월에 몸을 맡겨 이리저리 몸을 눕힐 줄 아는 지금의 나이가 좋다. 아무렴 좋다.
문밖에서 부는 바람소리에 촛대의 불이 미묘하게 흔들렸습니다. 달빛이 환하게 현의 방을 비추는 야심한 시각이었지요.
“무릇 양반이라면 돈은 손으로 만지지 말고 쌀값을 직접 물어보아도 안 된다. 아무리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는 국부터 먹어서도 아니 된다.”
다리가 저려오고 눈꺼풀이 점점 감겨왔지만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었던 현은 꿋꿋하게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하회마을에서 현의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현의 집안은 대대로 훌륭한 벼슬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가문이었습니다. 그런 가문의 외아들인 현은 아버지와 가문의 대를 이을 귀한 증손인 것이지요.
아버지께서 침소에 드셨으나 현은 달빛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현은 이러한 양반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들에 대한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대한 답답함과 양반과 상민의 신분차이에 대한 위선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였습니다. 현의 집에서 머슴으로 지내는 만복이가 살금살금 대문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독 야심한 밤 잦은 외출이 의심스럽던 만복이었습니다. 마음도 심란하고 마침 잠도 쉬이 오지 않던 현은 만복이의 뒤를 쫒기 시작하였지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향하던 만복이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일곱 명 정도의 동네 머슴들이 모여 있었고 각자 하나같이 희한한 모양의 탈을 쓰고는 중얼중얼 말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이보게 선비, 나는 사대부 집안의 뼈대 있는 양반이라오.”
“이보게 양반, 나는 오대부 육대부 집안의 뼈대 있는 선비라오.”
가만히 들어보니 양반과 선비들을 비꼬는 식의 놀이마당 인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재미있는 모양의 탈을 쓰고 있었지요.
마을의 머슴들이 모여 하나같이 양반과 파계승, 선비들을 비웃고 비꼬는 내용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충격과 거기에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만복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현은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아까의 탈놀이가 잊히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득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현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만복이는 어김없이 대문으로 향하고 종종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하였지요. 그 뒤를 조용히 밟던 현은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다다랐고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만복이는 자신들이 양반을 희롱하였다는 사실이 들켜 엄벌을 받을까 두려웠고 무리들도 자신들이 모시는 양반에 알려질까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현은 뜻밖의 제안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이 무리에 끼워주시오. 탈을 쓰고 놀이를 한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오.”
어리둥절한 무리의 사람들과 만복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현은 단오하게 무리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자신이 양반에 대한 위선과 회의감을 털어놓고 이 무리들에게 양반에 대한 허와 실을 말하며 양반인 자신이 직접 탈놀이를 하여 더욱 사실적인 탈놀이가 될 것이라며 끊임없이 설득하고 또 설득하였습니다. 끝내 무리는 현을 받아들이게 되고 현의 얼굴에 맞는 양반탈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매일 무리들과 연습을 하던 현은 본격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몇 회씩 놀이가 거듭될수록 현의 자신감은 날로 늘어나고 놀이판도 더욱 신명나고 재미있어 상민들 사이에 큰 입소문을 타면서 저잣거리의 큰 행사로 자리가 잡혔습니다.
처음에는 장단에 맞추어 어깨춤만 추며 몇 마디 대사로만 이루어졌던 탈놀이가 악기들이 늘어나 더욱 신명나고 대사들은 더욱 신랄해지며 구경꾼들도 함께 참여하는 큰 놀이마당으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놀이판이 점점 커지면서 양반들의 귀에도 하나 둘씩 탈놀이에 대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양반들은 치욕스럽고 화가 치밀었지만 하나둘 씩 그 내용이 궁금하긴 하였습니다. 이로써 양반들은 서로 쉬쉬하며 탈놀이를 보기위해 저잣거리로 나가는 양반들도 생겨나게 되고, 현은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지요. 다른 마을에서도 소문을 듣고 탈놀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늘게 되고 지금도 양반탈을 쓴 현은 신명나는 놀음 한 판을 벌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사람들 발만 보고 있어도 현기증이 올라왔다. 대전역 1번 출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가고 있어서 그런지 반소매를 입고 있는 사람부터 가벼운 카디건을 입은 사람까지 통일감이라곤 없어서 더욱 북적임이 심했다.
현영은 1번 출구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생각보다 늦어지자 초조한 마음에 한쪽다리를 살짝 떨고 있었다. 애꿎은 휴대전화 버튼만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멀리서 할아버지 한분이 같은자리에서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았다. 도와드릴까? 괜히 끼어드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순간에도 할아버지는 계속 1번 출구 주변만 두리번거렸다. 할아버지 옆에는 8살쯤으로 보이는 꼬마아이도 보였다. 옆에서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에 도무지 신경을 집중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안되겠다 싶어 할아버지께로 다가갔다.
“저기. 할아버지. 어디 찾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고맙네. 한밭교육박물관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되는지 모르겠네.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오늘따라 길을 자꾸 헤매네, 허허”
할아버지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옆에 꼬마 아이는 할아버지 옆에 꼭 붙어서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아, 한밭교육박물관이요? 여기에서 가까워요. 이 근처에요. 여기에서 가셔도 되고, 3번 출구로 나가시면 더 가깝고요.”
“아 그런가? 고맙네, 고마워.”
할아버지는 서양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중후한 노년의 신사 모습이었다. 어쩐지 박물관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꼬마아이는 할아버지의 손주였을 것이고 주말을 이용해서 아이와 박물관 나들이를 하시려는 듯했다.
한밭이라. 대전에 쭉 살면서도 한밭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참 생소했다. 최근에는 한밭대학교나 한밭수목원, 한밭야구장까지 대전이라는 지명을 한밭이라는 옛 지명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에도 약간의 시대적 이질감이랄까? 그런데 아까 만난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한밭이라는 단어는 참 정감 있었다. 할아버지와 잘 어울린달까?
현영이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친구가 도착했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친구는 오늘 약속시간에 늦은 대가로 오늘 현영이 하자는 것에 군말 없이 따른다고 했다. 현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친구에게 뜻밖의 장소에 가자고 했다.
한밭교육박물관이었다. 지금 그곳에 간다면 아까 마주친 할아버지와 꼬마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물관? 무슨 황금 같은 주말에 박물관이야~ 우리가 무슨 열혈 초등생이니?”
“방금 전에 내가 하자고 하는 거 군말 없이 따른다며! 그리고 원래 배움에는 끝이 없는 거야!”
친구의 팔을 잡아당기다시피 하여 도착한 한밭교육박물관.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았지만 역 근처처럼 복잡한 느낌은 아니었다. 정돈된 느낌이 가지런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밭이라는 느낌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꼬마가 있는 그림이 썩 잘 어울리는 곳이기도 했다.
많은 꼬마손님들이 갖가지 민속체험을 하며 하하 호호 웃음소리를 냈다. 전시공간에는 교과서에서만 보던 책들이 있었다. 현영은 전시를 구경하며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까 만난 할아버지와 꼬마아이를 찾는 중이었다.
‘벌써 가셨나? 아쉽네.’
현영이 관람을 마친 뒤 뒤돌아 나가려는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와 꼬마아이 모습이 보였다.
현영은 빙그레 웃었고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