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원을 그려보았다. 손끝을 따라서 동그란 원이 그려졌다. 그리고는 나무를 향해 말했다.
“나는 일곱 살이야. 너는? 너는 나이가 많으니?”
그리고는 밟아도 소리 나지 않고 발이 푹푹 빠지는 아주 고운 모래에 다시 동그마니 원을 그렸다. 손끝을 따라 그려지는 원은 모래에 나이테가 그려지는 듯 동그랗게 또 동그랗게 그려져 나갔다. 여러 개의 원이 모이니 톱니바퀴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린근원의 손끝에 흐르는 동심원은 점점 더 퍼져나갔다.
근원은 등산화 끈을 조금 당겼다. 오늘은 등산 동호회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A, B팀으로 나뉘어 각자 배정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근원은 A팀에 배정되었고 아침으로는 김밥과 음료수, 물이 주어졌다.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로 버스를 가득 메웠고 근원은 홀로 창가쪽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데 오늘의 사회자로 나선 남자가 마이크를 잡으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근원은 목적지까지 조용히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대다수의 입장에 반기를 들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신경을 다른 데로 쏟기 위해 근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시집을 꺼내들었다. 친구 따라 얼떨결에 한두 번쯤 나가본 시사랑 동호회에서 추천받아 사게 된 시집이었다. 시를 잘 모르는 그였기에 어쩌면 시를 더욱 잘 읽고 느낄 수 있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노송’이라는 제목의 시가 등장했다. 8줄 내외로 간략하게 쓰인 시에는 늙은 소나무에 대한 작가의 영감이 손끝을 타고 강렬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읽기 어려운 점이 없었음으로 근원은 비교적 잘 쓴 시라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한번 읽고 밀려오는 졸음에 정신을 내어주고 목적지까지 다다랐을 그였지만 근원은 자신이 시를 쓰는 작가라면 늙은 소나무를 가지고 어떤 시를 써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읽었던 시가 머릿속에 맴돌아 근원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근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몸짓이었다.
‘늙은 소나무라. 소나무는 원래 좀 늙지 않았나? 어디를 돌아다녀보아도 1,2년 된 소나무는 거의 못 본 것 같은데. 한 400년쯤은 되어야 하지 않나?’
근원은 속으로 속삭였다. 속으로 말하는 것이라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근원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도착 10분 전입니다. 오늘 저희가 가기로 한 곳은 산이 아니라 트레킹 코스이기 때문에 크게 힘든 점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므로 단단히 준비하시고 내리셔서 일사분란하게 모여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소나무가 정말 예술입니다.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하니까 그곳에서 사진 찍으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제 차가 멈춰서면 내리세요.”
사회를 맡았던 남자는 도착 10분전을 알리며 깔끔하게 정리멘트를 보냈다. 근원도 잠시 생각을 접고 내릴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모처럼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 따라 물 따라 걷는 트레킹 코스였다. 사회자 남자의 말에 의하면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했다. 남자는 차안에서 읽은 시를 떠올렸다.
날이 맑아서인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리 동호회 사람을 제외하고도 많은 인파가 색색 깔의 등산복을 입고 소나무 숲길을 걷기위해 몸을 풀었다. 간단히 준비운동을 한 뒤 각각 흩어져 걷기 시작했다. 송림이 우거진 숲에 다다르자 길게 뻗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그 자태를 뽐내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고 근원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소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오백년 된 늙은 소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노송이라’
근원은 머릿속에 시를 그려나갔다.
늙은 소나무
너는 말없이 늙어있구나
너의 늙음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너의 몸에 동그라미를 그려나갔구나
지나간 세월만큼 너는 늙어있구나
굵은 기둥은 단단하고
네 몸뚱이에서 풍겨오는 짙은 냄새가
너의 늙음을 대신하는 구나
근원은 다시 한 번 흙바닥에 동그마니 원을 그려보았다. 어린 근원이 모래바닥에 작은 동심원을 그려 넣듯이 늙은 소나무 앞에서 동심원을 그려나갔다.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빛처럼 어둑한 날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다. 차마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는 분이니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다가 조금은 진지하게 묵례를 했다. 가볍게 바람이 일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내가 선생을 이토록 추억하는 건 선생에 대한 감사와 존경도 있겠지만 생각이 가진 무게와 선생이 늘 지니고 있던 칼의 무게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나라의 한 국민이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가 그 기다란 칼 하나에 온 백성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기에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생각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하루에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것이고 그것은 단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백성들의 목숨이고 이는 한 가정의 기둥의 목숨이기 때문에 늘 고뇌에 차있고 누구보다 두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눈을 뜨고 감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고 말 한마디에 수백만의 목숨과 나라가 달려있었기에 태산 같은 두려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으리라.
그래도 그가 그의 삶을 다하는 순간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긴 칼로 누구를 벨 것인가. 내가 베고 있는 것이 적장의 목숨일까 혹 자신의 삶이 아닐까 선생은 하루에 수도 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직분을 숙명처럼 고스란히 받아냈다.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갑옷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고 고된 삶 때문에 선생은 지친 몸을 뉘일 때도 차마 그 짐을 내려놓지 못했다. 언제든 일어나 적과 맞설 수 있도록 갑옷을 입고 칼을 옆에 두었을 것이다.
날이 점차 밝아졌다. 조금은 무거운 바람이 일자 대나무 숲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늘 한적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고 조용했다. 짙은 안개가 발아래 깔린 것만큼 진중하여 숨소리 한번 내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다.
내가 가진 삶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무게는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이렇게 힘들어 하냐고 내 자신을 채찍질 하고 싶을 때 이곳을 찾곤 한다.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낼 때. 이곳을 찾아 그분을 생각한다.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아무런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음에도 이곳을 찾으면 큰 위로를 받곤 한다. 그분의 칼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
날은 이제야 겨우 한낮의 빛을 찾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친구의 전화다.
“어디야? 지금 너희 집 근천데 나올래?”
“나 지금 아산이야.”
“너 또 현충사 다녀오는 길이야? 너도 참 대단하다. 사실 장소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매번 갈 때마다 새로워?”
“장소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니까. 네가 뭘 알겠냐.”
“학교에서도 존경하는 위인하면 한결같이 이순신장군이라고 쓰더니... 그래서 언제 올라오는데?”
“지금 가는 길이야.”
다시 이곳을 찾을 때에는 내 삶의 무게에 대한 답을 들고 오고 싶다. 그리고 선생과 함께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탁. 식탁에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무심하고 매정하다. ‘크음’ 하고 남편이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기침에는 증발하다 남은 알코올의 잔해가 남아있었고 이내 공기 중에 산산이 부서졌다.
후루룩후루룩 소리만 공중에 맴돌았다.
오늘도 아침엔 청양고추 팍팍 들어간 콩나물국이다. 남편에게 술 좀 그만 마시고 몸 생각 좀 하라고 그렇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도 마이동풍이다. 이런 잔소리가 오고 가고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반복될 때면 어느 집이나 어느 가정이나 다 비슷한가 보다 생각이 든다. 예전에 우리 엄마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킁킁, 이건 아빠의 냄새다. 아빠가 또 약주를 한 잔 하신 모양이다. 엄마가 한결같이 잔소리를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빠는 참 올곧은 사람이다. 엄마는 아빠에게 잔소리를 빙자하여 모진 소리도 하지만 그건 다 아빠를 위한 거란다.
술이 좋으면 술이랑 함께 살라고 하던가, 술독에 빠진 사람도 당신만은 못할 거야라는 등의 말을 들어도 아빠는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이다.
아빠는 내게 호랑이같이 무서운 사람이다. 요즘은 딸 바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딸이라면 그저 풀려버린 자물쇠처럼 무장해제인데 우리 아빠는 철저했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언제 들었나 가물가물하다. 심지어 다른 애들은 늦은 시간이 되도록 딸이 귀가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전화를 한다는데, 우리 아빠가 내게 전화를 할 때에는 아빠 출근 시간에 차키를 두고 왔을 때 가지고 내려오라는 것이 유일했다.
그런 아빠가 무장해제가 되고 딸 바보가 되는 날. 바로 술을 한잔 하시고 들어오실 때이다.
“연주 자니? 아빠 왔어. 아빠가 왔는데 왜 나와 보지도 않아? 이리 와봐.”
“아휴, 술 냄새. 아빠 또 술이야?”
“아이고, 우리 연주 아직 애기네 애기야. 아빠 수염 까끌까끌 하지?”
“아, 따가워. 그리고 이것 좀 놔. 숨 막힌단 말이야.”
사실은 숨이 막혔던 것이 아니라 아빠의 품이 썩 어색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빠는 지금 이런 모습을 다음날 아침 기억하실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온 다음날이면 북어와 콩나물을 넣은 해장국을 끓여주신다. 특히 청양고추를 송송 썰고 고춧가루까지 팍팍 쳐 아주 매콤하고 칼칼하게 말이다. 내가 맵다고 고추를 쏙쏙 건져놓으면 아빠는 아빠그릇에 넣으라고 손짓을 한다.
엄마는 밥을 먹는 내내 아무 말도 없다. 아빠도 마른기침만 뱉을 뿐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마다 벌어지는 풍경이다. 숟가락으로 밥 한 숟갈 뜨고 엄마 눈치 한번. 국 한 숟갈 뜨고 아빠 눈치 한 번씩 번갈아가며 밥을 먹으면 엄마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괜히 나에게 호통을 치신다. 밥 먹는데 집중하라고. 치, 밥 먹는데 무슨 집중이람.
내가 더 어렸을 때는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하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 반 지영이네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지영이네 아빠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지영이네 엄마는 우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빠가 술을 마시고 온 날이면 안방 문을 배꼼 들여다보며 엄마가 우시는지 확인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빠를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매콤하고 칼칼한 청양고추를 듬뿍 넣어 아침상을 차려드린 걸 보면 안다.
내가 지금 그러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저녁때가 다가와 장 보러 나갈 준비를 하자 어린 아들이 또 마트에 가자고 성화였다.
“엄마는 마트 말고 시장 갈 거야. 같이 갈래?”
“싫어! 시장은 냄새난단 말이야!”
아이가 잔뜩 토라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내 오늘 저 녀석의 볼기짝을 때려 주리라 결심하고 뒤를 홱 돌아보았는데, 일곱 살 밖에 안 된 쪼끄만 게 눈치는 또 삼단이라 벌써 제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내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부으셨다. 최신 전자기기를 반에서 가장 먼저 갖게 되는 것도 언제나 나였고, 가정부 아주머니가 말끔히 다려 준 교복을 입고 등교했으며, 방과 후 교문 앞에는 항상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고, 내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남들에게 없는 것도 다 있었고, 갖고 싶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나날이 콧대가 높아져만 갔다.
어느 날은 교문 앞에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없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두 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아버지께 이 일을 다 일러바쳐서 혼쭐이 나게 해 주리라고 벼르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안이 소란스러웠다.
“영희야, 넌 안에 들어가 있어라.”
한 번도 내게 엄한 얼굴을 보인 적이 없던 아버지였는데, 표정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엿들었다. 아버지의 친구에게 명의를 빌려 준 일이 있는데, 모르는 새에 아버지 앞으로 빚이 엄청나게 쌓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가게를 팔고 새로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나를 할머니께 맡기고 어딘가로 떠나셨다.
갑작스레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은 불만이었지만, 전에 사 두었던 워크맨 같은 것들이나 외국에 다녀온 이야기들로 쉽게 새 친구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나는 빠르게 새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는 모두들 나를 부잣집 딸로 알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고기반찬이 하나도 없는 밥상 앞에 앉을지라도, 학교에서만은 여전히 내가 공주님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큰 약점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할머니가 나물 장수라는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맡아 키우시게 된 이후로 밤낮 없이 나물을 캐러 다니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싫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매일같이 내 교복을 다려주셨지만, 우리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보다도 낡은 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하교하던 나는 저 만치 멀리 길바닥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강아지, 지금 끝난 거여?”
할머니는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드셨지만,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이상한 할머니네.’하고 시치미를 뗐다. 할머니는 내가 보낸 경멸의 시선을 빠르게 알아차리셨고, 내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계셨다.
이 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가세가 회복되어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까지 나는 한 번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물을 다 팔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내게 저녁상을 차려 주셨다. ‘우리 강아지, 배고팠지?’하시면서 말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는데, 내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내 철없던 행동들을 반성했지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걷다 보니 어느 새 시장 입구였다. 간판까지 내 걸고 깔끔하게 새 단장을 마쳤지만, 거기에 서 계시는 노인들의 모습은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아이고, 오늘도 나오셨네. 봐봐. 오늘은 고사리가 아주 싱싱해.”
허물없이 건네는 인사들과 웃음이 오갔다. 나는 이 반듯한 신식 시장과 그 안에서 어우러져 피어나는 구수한 웃음들을 보며, 새침데기 고등학생이던 나와 우리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 때 웃으며 할머니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더라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몇 갑절은 많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 동네에는 더 많은 마트가 들어서겠지만, 나는 그 때에도 골목을 누비며 시장을 찾아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귀퉁이 어딘가에서, 또 어느 할머니에게 나물 한 봉지를 사야지. 그런 생각들을 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소리들 몇 가지가 있다. 보글보글 끓던 어머니의 된장찌개 소리, 지글지글 삼겹살이 익는 소리, 뎅그렁 하는 풍경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몽돌해변의 자갈 소리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던 사람들이 ‘엥?’하며 반문해 오는 것이 바로 이 마지막 소리. 몽돌해변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야, 너희들이 해변을 몰라서 그래. 해변 그리라고 하면 모래사장만 그리지? 이 형님이 알고 있는 해변은 말이야…….”
말 그대로 주변에는 의외로 모래로 덮인 해변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한 번 빠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것이 바로 이 몽돌해변, 그 중에서도 몽돌들이 파도에 구르면서 나는 자그락자그락 하는 소리다.
나는 몽돌해변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천 년대 초반, 아이들은 아직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매일 방과 후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몽돌 위를 달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렸을 때에는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뭐든 재미있다는 말이 맞다. 예쁜 색의 몽돌을 찾는 것도, 제일 큰 몽돌을 찾아오는 것도, 똑같이 생긴 몽돌을 찾는 것도 모두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다.
그런데 해가 넘어가기 시작해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여전히 몽돌해변에 있었다. 다른 지방에서 장사를 하셨던 부모님은 노을이 다 진 뒤에야 돌아오셨다. 혼자 집에 있는 게 무서웠던 깡마른 초등학생 꼬마는 몽돌해변에 앉았다.
자그락자그락, 파도가 몽돌 새를 스치며 묘한 소리를 냈다. 쌀을 씻는 소리 같기도 하고, 조개껍질이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몽돌 위에 누워, 나는 한참이나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은 몽돌해변으로 가자.”
여름방학을 맞아 여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모인 것이었는데, 난데없는 추억 얘기가 길어졌다. 머쓱해진 나는 ‘달궈진 모래에 몸을 파묻는 장난은 칠 수 없겠지만, 따뜻한 몽돌 위에 누워 있으면 온돌 침대가 따로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자! 재미있겠는데? 나도 정동진이나 해운대 같이 예쁘기로 소문난 해변은 많이 가 봤는데, 몽돌해변은 한 번도 안 가봤어.”
그런데 내 얘기에 빠져 있던 친구들이 모두 오케이 사인을 보내 왔다. 몽돌해변이 뭔지 모르는 친구들이 절반은 됐는데, 몽돌해변에 가 본 친구들이 줄줄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앉은 자리가 몽돌해변 이야기로 들썩였다.
“몽돌이면 조약돌 같은 거지? 이름 정말 예쁘다. 돌 하나 주워 와도 돼?”
“당연히 안 되지, 임마. 너 같은 사람들 때문에 해변이 없어지는 거야. 대학생씩이나 돼 가지고 자연 망칠 생각부터 해?”
독설가로 소문 난 영민이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해서 얼떨결에 몽돌해변에 가 보게 되었다.
울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깜빡 잠이 든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오렌지 빛깔의 노을과 흑진주 같은 몽돌 사이에 누워 하루의 마지막 볕을 쬐고 있었다. 자그락자그락, 아이들의 작은 발이 몽돌 위를 달린다.
어디선가 ‘현규야, 밥 먹자!’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 목소리도, 몽돌의 온기도 아주 따뜻했기 때문에 나는 꿈속에서 또 잠이 들어버렸다.
자영업을 하기 때문에 평소 쉽게 가게 문을 닫을 수 없었던 남자. 그래서 주기적으로 떠나는 휴가도 한번 제대로 떠나본 일이 없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3년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지난 3년간 아내와 아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이게 다 처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버는 돈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미안하긴 했어도 조금은 당당했다. 그런 남편을 아내도 적잖이 이해해주는 눈치였다.
생전 가게로 전화를 안 하는 아내인데 웬일인지 가게로 다 전화를 했다. 아내의 말이 빨랐고 약간은 울먹였다.
“전화가 왔었어요. 방금. 민준이 담임선생님한테.”
“담임선생님한테? 왜? 민준이 뭐 사고친거야?”
“아, 아니. 학교에서 청소년 우울증 상담검사 같은 걸 받았는데. 결과가….”
평소 전화는커녕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 소리 한번 듣지 않았던 터라 심장이 덜컹했다. 차라리 친구와 싸우거나 숙제를 안 해왔다는 전화였으면 좋았을 걸. 담임선생님의 전화는 뜻밖에도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청소년 우울증에서 우울증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좀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였다.
우울증. 학교 다니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나? 아니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가 좋지 않나? 그런 것도 아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담임선생님께선 아이들과의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했으니까.
누구를 위한 3년의 시간이었나 생각한다. 남자는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는데 아이는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나보다.
모처럼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월성계곡으로 떠났다. 병원을 가보기 전 일단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담임선생님의 소견이었다. 아이는 즐거워보였다.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니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정 상태는 어떤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방송을 타서인지 계곡에는 때 늦은 피서객이 몰려들었다. 아빠와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아이도 보였고 튜브를 타고 물살을 즐기는 아이들도 보였다. 멀리서 고기 굽는 냄새와 옥수수를 먹는 아이들이 보이며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내 아이의 머릿속도 아니 마음속도 한가롭다고 느껴지면 좋을 텐데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물은 시리도록 맑았고 푸른빛이 맴도는 풍경은 봄의 화사함만큼이나 밝았다. 저마다 하하 호호 웃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방갈로 마다 퍼져나갔다.
하루를 아이와 꼬박 즐겁게 놀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남자의 머릿속은 금세 까마득해졌다. 내심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해맑게 방갈로를 뛰어다녔고 여느 때와 같이 즐거워보였다. 은근슬쩍 학교에서의 생활을 물어보기 좋은 시간이었다.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어? 친구들과 사이는 어때? 공부하는 것이 지치니?”
“아빠,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빨리 대답해봐. 응?”
“음. 아빠! 우리 다음에는 또 어디가요?”
중학교 3학년 국어 시간, 같은 반 아이들은 우리가 사는 동네가 교과서에 나온다며 즐거워했지만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내가 원미동에 살게 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한 사람처럼 나는 눈앞에 닥쳐온 걱정들을 빠르고 무딘 방법으로 해결하길 원했으며 별다른 불만사항은 물론이고 별다른 꿈도 없었다.
넉넉지 못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난 탓일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 본 곳이라고는 국립공원이나 친척 집뿐이었다. 또래들과 같은 시기에 컴퓨터를 사지도 못했고, 유원지나 해외여행 같은 곳에 가자고 졸라본 적도 없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디지털 시대를 달릴 때 나는 홀로 아날로그 시대를 걸었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방학숙제를 위해 박물관에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셨고, 나는 묵묵히 오천 원짜리를 받아들고 집을 나섰다. 내가 원미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부천 만화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하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좀처럼 돈을 벌기 힘들다는 직업을 택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자간의 대화가 갈수록 줄고 있는 것 또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미 1동의 연립주택 203호에서 가장 가까운 박물관은 지하철로 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부천 만화박물관.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현실적인 범주 안에서의 판단이었다. 대강 훑어보고 견학문을 쓸 요량으로 빠르게 걸었다. 영화관에 가기보다는 만화방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나였지만, 아이들처럼 뽀로로를 외치며 뛰어다닐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멈추어 선 곳은 볼록거울 앞이었다. 돌연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내 모습이 사방에 펼쳐진 것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뒤틀리고 구부러진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을 다 해 보았다.
왜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기껏 외출할 기회가 생겼는데, 왜 고작 집 근처에 위치한 박물관에 와야 하는 것일까. 내 어깨는 왜 항상 움츠러들어 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여기에 이상한 거울을 설치해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지에 대한 의문에 코너의 이름을 보니 ‘만화가의 머릿속’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가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웃음이 터진 나는 만화가의 머릿속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찬찬히 살펴보았다. 엉뚱한 상상력과 꿈이 넘치는 일상. 그곳은 아버지의 머릿속이었다.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 하였듯이, 우스꽝스러움과 독특함 또한 종이 한 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폐관시간까지 박물관을 떠나지 못했다. 만화가들은 여전히 가난해 보였고,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내 몫의 저녁상을 차려놓은 채로 잠들어계셨다. 분명 어젯밤에도, 어쩌면 그제 밤에도 밤샘을 하셨을 것이다. 나는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어 아버지에게 덮어드리고는 다 식은 국을 맛있게 떠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 안에 위치한 비즈니스 센터로 일터를 옮기셨다. 입주 경쟁이 꽤 치열한 곳이라고 했는데, 용케 심사를 통과하셨다.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과 부천 만화박물관이 부천 영상 문화 단지 안에 나란히 입주해 있었다. 사무실 이전을 도우며, 나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빠, 나 있잖아. 나도 그림을 그려볼까 해.”
아버지는 대답 대신 웃으셨다.
그날 저녁, 나는 원미동 연립주택의 거실에 누워 <원미동 사람들>을 읽었다. 교과서에 실린 김포 슈퍼와 형제 슈퍼 얘기가 전부인 줄 알았더니 꽤 두꺼운 연작소설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 첫 단편의 소제목이 보였다. ‘멀고도 아름다운 동네’. 그곳은 내가 사는 동네였으며, 아버지가 사는 동네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변하고 강산이 변하여 내가 사는 모습 또한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 태백산맥 말단의 백양산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내 상세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백 년을 사는 속세의 사람들은 하루를 단위로 가치를 매기나, 수천 년을 사는 내게 하루하루는 덧없이 흐르는 세월 속의 한 자락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내 명도 다하여 백양산 어느 언저리에 조용히 젖어 들고자 하니, 눈에 띄는 것은 천 년 전이나 다름없이 운수사 뿐이라.
이 절이 처음으로 지어지던 날 또한 내 상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여느 때처럼 산을 한 바퀴 휘이 돌아 잠을 자러 가던 차에, 가야국의 사람 몇이 서까래가 될 나무들을 날라 오던 모습만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잠시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엿들어 보았었다.
“이곳에서 상서로운 운하가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는 게 정말인가?”
“그럼. 나는 본디 가락에 살던 사람이라 이 산을 자주 올려다보았네. 아침이면 이곳에서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꽃 무지개가 뜨는 것을 가락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았지.”
“그것 참 신통한 일일세. 아마 이 곳에 신선이 살고 있나 보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만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천 년을 살아온지라, 내가 기침하여 하품을 할 때면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기지개를 켤 때면 꽃 무지개가 뜨는 것을 가야국의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이 깊은 산중까지 내 흔적을 찾아올 생각을 한 것이 참으로 기특하여 운수사가 완공되었을 때, 이곳을 복전으로 만들어 줄 복두꺼비 한 마리를 몰래 내려 주었다.
그런데 운수사 터는 자꾸 넓어져만 갔다. 소원을 들어 준다는 영험한 두꺼비 바위를 찾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 끼의 공양을 짓는 데 쌀뜨물이 운수 계곡을 거쳐 십 리나 떨어진 모라 마을까지 흘러내릴 정도이니, 이 정도면 과하다 하겠다. 가야인들의 심성이 선하여 자연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매일같이 인파가 다녀가니 내 몸 하나 편히 누일 곳이 사라져 가더라. 내 용왕과도 각별한 사이인지라 산신각 대신에 용왕각을 지은 것은 개의치 않으나, 날이 갈수록 산중이 소란스러워짐은 쉬이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 중히 여기던 산의 한 자락을 기꺼이 내어 주었거늘, 어찌하여 산을 이리 마음대로 누리는가. 산중을 거니는 것이 유일한 내 귀에 매일같이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니, 내가 견디기가 힘들어지는구려.”
벼르다 못해 주지 스님의 꿈에 나타나자 선한 주지 스님이 예상치 못한 호령에 황망해 하더라. 고민 끝에 주지 스님이 두꺼비 바위의 턱을 깨어 버리자, 본디 용왕에게서 맡아 바위 안에서 기르던 청사자 한 마리가 그대로 떠나 버렸다. 용왕께 돌려보낼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런 일에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동안 구름이 피고 무지개가 뜨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줄고 종국에는 사세가 기울어 가더라. 미안한 마음에 세진당 모퉁이에 팽나무 한 그루를 심어 두었다.
두꺼비 바위에서 도망친 청사자는 범어사로 갔다 하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 운수사도 천년고찰의 칭호를 얻게 되니, 이 또한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왜적의 난으로 불에 탔던 건물도 모두 복원되었으나, 운수사의 낡은 처마 끝에 나와 함께 지내 온 세월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금정봉과 불웅령을 돌아 하천 줄기를 따라 낙동강까지 둘러보았다. 마실의 종착지는 언제나 운수사 대웅전 앞이다. 나와 함께 천 년을 숨 쉰 곳이니, 이 조용한 절에 녹아들어 신선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 년을 숨 쉬어 온 절과 함께 천 년을 더 걸어갈 꿈을 꾸니, 마지막 꿈으로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은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