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원을 그려보았다. 손끝을 따라서 동그란 원이 그려졌다. 그리고는 나무를 향해 말했다.
“나는 일곱 살이야. 너는? 너는 나이가 많으니?”
그리고는 밟아도 소리 나지 않고 발이 푹푹 빠지는 아주 고운 모래에 다시 동그마니 원을 그렸다. 손끝을 따라 그려지는 원은 모래에 나이테가 그려지는 듯 동그랗게 또 동그랗게 그려져 나갔다. 여러 개의 원이 모이니 톱니바퀴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린근원의 손끝에 흐르는 동심원은 점점 더 퍼져나갔다.
근원은 등산화 끈을 조금 당겼다. 오늘은 등산 동호회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A, B팀으로 나뉘어 각자 배정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근원은 A팀에 배정되었고 아침으로는 김밥과 음료수, 물이 주어졌다.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로 버스를 가득 메웠고 근원은 홀로 창가쪽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데 오늘의 사회자로 나선 남자가 마이크를 잡으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근원은 목적지까지 조용히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대다수의 입장에 반기를 들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신경을 다른 데로 쏟기 위해 근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시집을 꺼내들었다. 친구 따라 얼떨결에 한두 번쯤 나가본 시사랑 동호회에서 추천받아 사게 된 시집이었다. 시를 잘 모르는 그였기에 어쩌면 시를 더욱 잘 읽고 느낄 수 있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노송’이라는 제목의 시가 등장했다. 8줄 내외로 간략하게 쓰인 시에는 늙은 소나무에 대한 작가의 영감이 손끝을 타고 강렬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읽기 어려운 점이 없었음으로 근원은 비교적 잘 쓴 시라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한번 읽고 밀려오는 졸음에 정신을 내어주고 목적지까지 다다랐을 그였지만 근원은 자신이 시를 쓰는 작가라면 늙은 소나무를 가지고 어떤 시를 써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읽었던 시가 머릿속에 맴돌아 근원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근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몸짓이었다.
‘늙은 소나무라. 소나무는 원래 좀 늙지 않았나? 어디를 돌아다녀보아도 1,2년 된 소나무는 거의 못 본 것 같은데. 한 400년쯤은 되어야 하지 않나?’
근원은 속으로 속삭였다. 속으로 말하는 것이라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근원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도착 10분 전입니다. 오늘 저희가 가기로 한 곳은 산이 아니라 트레킹 코스이기 때문에 크게 힘든 점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므로 단단히 준비하시고 내리셔서 일사분란하게 모여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소나무가 정말 예술입니다.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하니까 그곳에서 사진 찍으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제 차가 멈춰서면 내리세요.”
사회를 맡았던 남자는 도착 10분전을 알리며 깔끔하게 정리멘트를 보냈다. 근원도 잠시 생각을 접고 내릴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모처럼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 따라 물 따라 걷는 트레킹 코스였다. 사회자 남자의 말에 의하면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했다. 남자는 차안에서 읽은 시를 떠올렸다.
날이 맑아서인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리 동호회 사람을 제외하고도 많은 인파가 색색 깔의 등산복을 입고 소나무 숲길을 걷기위해 몸을 풀었다. 간단히 준비운동을 한 뒤 각각 흩어져 걷기 시작했다. 송림이 우거진 숲에 다다르자 길게 뻗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그 자태를 뽐내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고 근원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소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오백년 된 늙은 소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노송이라’
근원은 머릿속에 시를 그려나갔다.
늙은 소나무
너는 말없이 늙어있구나
너의 늙음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너의 몸에 동그라미를 그려나갔구나
지나간 세월만큼 너는 늙어있구나
굵은 기둥은 단단하고
네 몸뚱이에서 풍겨오는 짙은 냄새가
너의 늙음을 대신하는 구나
근원은 다시 한 번 흙바닥에 동그마니 원을 그려보았다. 어린 근원이 모래바닥에 작은 동심원을 그려 넣듯이 늙은 소나무 앞에서 동심원을 그려나갔다.
세월이 변하고 강산이 변하여 내가 사는 모습 또한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 태백산맥 말단의 백양산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내 상세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백 년을 사는 속세의 사람들은 하루를 단위로 가치를 매기나, 수천 년을 사는 내게 하루하루는 덧없이 흐르는 세월 속의 한 자락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내 명도 다하여 백양산 어느 언저리에 조용히 젖어 들고자 하니, 눈에 띄는 것은 천 년 전이나 다름없이 운수사 뿐이라.
이 절이 처음으로 지어지던 날 또한 내 상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여느 때처럼 산을 한 바퀴 휘이 돌아 잠을 자러 가던 차에, 가야국의 사람 몇이 서까래가 될 나무들을 날라 오던 모습만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잠시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엿들어 보았었다.
“이곳에서 상서로운 운하가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는 게 정말인가?”
“그럼. 나는 본디 가락에 살던 사람이라 이 산을 자주 올려다보았네. 아침이면 이곳에서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꽃 무지개가 뜨는 것을 가락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았지.”
“그것 참 신통한 일일세. 아마 이 곳에 신선이 살고 있나 보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만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천 년을 살아온지라, 내가 기침하여 하품을 할 때면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기지개를 켤 때면 꽃 무지개가 뜨는 것을 가야국의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이 깊은 산중까지 내 흔적을 찾아올 생각을 한 것이 참으로 기특하여 운수사가 완공되었을 때, 이곳을 복전으로 만들어 줄 복두꺼비 한 마리를 몰래 내려 주었다.
그런데 운수사 터는 자꾸 넓어져만 갔다. 소원을 들어 준다는 영험한 두꺼비 바위를 찾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 끼의 공양을 짓는 데 쌀뜨물이 운수 계곡을 거쳐 십 리나 떨어진 모라 마을까지 흘러내릴 정도이니, 이 정도면 과하다 하겠다. 가야인들의 심성이 선하여 자연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매일같이 인파가 다녀가니 내 몸 하나 편히 누일 곳이 사라져 가더라. 내 용왕과도 각별한 사이인지라 산신각 대신에 용왕각을 지은 것은 개의치 않으나, 날이 갈수록 산중이 소란스러워짐은 쉬이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 중히 여기던 산의 한 자락을 기꺼이 내어 주었거늘, 어찌하여 산을 이리 마음대로 누리는가. 산중을 거니는 것이 유일한 내 귀에 매일같이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니, 내가 견디기가 힘들어지는구려.”
벼르다 못해 주지 스님의 꿈에 나타나자 선한 주지 스님이 예상치 못한 호령에 황망해 하더라. 고민 끝에 주지 스님이 두꺼비 바위의 턱을 깨어 버리자, 본디 용왕에게서 맡아 바위 안에서 기르던 청사자 한 마리가 그대로 떠나 버렸다. 용왕께 돌려보낼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런 일에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동안 구름이 피고 무지개가 뜨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줄고 종국에는 사세가 기울어 가더라. 미안한 마음에 세진당 모퉁이에 팽나무 한 그루를 심어 두었다.
두꺼비 바위에서 도망친 청사자는 범어사로 갔다 하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 운수사도 천년고찰의 칭호를 얻게 되니, 이 또한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왜적의 난으로 불에 탔던 건물도 모두 복원되었으나, 운수사의 낡은 처마 끝에 나와 함께 지내 온 세월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금정봉과 불웅령을 돌아 하천 줄기를 따라 낙동강까지 둘러보았다. 마실의 종착지는 언제나 운수사 대웅전 앞이다. 나와 함께 천 년을 숨 쉰 곳이니, 이 조용한 절에 녹아들어 신선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 년을 숨 쉬어 온 절과 함께 천 년을 더 걸어갈 꿈을 꾸니, 마지막 꿈으로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은 꿈이다.
사 년 차 커플. 남들은 그 쯤 되면 서로에게 질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악담을 농담처럼 건네지만, 우리는 결혼을 생각할 만큼 진지했다. 새내기 때부터 사귀기 시작 해 내가 입대를 하고, 제대 할 때까지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권태기가 오는 것을 걱정하기에는 이미 잔뼈가 굵어진 사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특별한 곳에 가고 싶어.”
밥을 먹다가 무심하게 한 마디 툭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그 말에 민주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민주는 눈에 띄게 짜증이 많아졌고, 우울해 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민주의 이런 태도를 이별을 준비하는 여자의 태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군대에 다녀오면 남자가 여자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민주는 내가 군대에 가기 전보다 훨씬 더 예쁘고 어른스러워졌다. 물론 외모나 성격 때문에 민주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게 민주는 우리가 함께 해 온 모든 시간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민주를 데리고 부산으로 향했다. 민주는 이제 가 볼만 한 곳은 다 가 보지 않았느냐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민주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저 오늘 내가 준비한 풍경이 민주가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기만을 빌었다.
민주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광안대교가 잘 보이는 민락 수변공원이었다. 벌써부터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는데, 민주는 또 그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으냐고 하며 화를 내는 통에 애를 먹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겨우 돗자리 하나를 깔고 자리에 앉았다.
“이 먼 데까지 와서 쉬지도 못하고 여기 있자고?”
나는 조금만 기다려 보라며 민주를 달랬다. 뭐가 민주를 그렇게나 짜증나고 화나게 만드는 것일까.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져 버렸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우리 둘 사이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처음 사귀었을 때를 생각하며 기차 안에서 건네주었던 인형은 가방 안에 처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에 민주는 토이 크레인에서 인형을 뽑아다 주면 어린 애처럼 하루 종일 그것을 안고 있곤 했었다. 이제는 그런 사소한 것들도 모두 변해 버린 것이다. 괜스레 장난을 치려다 민주의 화만 더 돋우게 된 나는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축제가 시작 되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 입을 열면 민주는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말을 할 것이다. 헤어지자는 그 말을 말이다. 나는 민주를 보며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성준아, 나 할 말이 있어.”
그 순간, 첫 불꽃이 터졌다. 민주의 다음 말은 불꽃이 터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성에 묻혀 버렸다. 나는 놀란 얼굴로 꽃처럼 피어나는 불꽃을 바라보는 민주를 꼭 안아 주었다. 민주는 봄날 캠퍼스에서처럼, 나를 첫눈에 반하게 했던 그 순진하고 예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민주는 내가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고 외쳐버렸던 것을 들어버렸을까.
민주가 특별한 곳에 가고 싶다고 했던 그 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지난 사 년 동안 우리가 갔던 모든 장소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민주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 가장 사랑했던 시간을 새롭게 기억하도록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어느 사진 속에서나 민주는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런데 수천 장의 사진 중에서 딱 한 장,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다. 서울 불꽃 축제에 갔다가 길을 잃어 불꽃은 구경도 하지 못하고 돌아온 날의 사진이었다. 괜히 미안해하는 내게, 민주는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로 괜찮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민주는 딱 한 마디를 했었다.
“불빛이 춤추는 걸 보고 싶었는데.”
그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귀로 흘려버렸던 그 말들을 하나씩 맞추어 나가다 보면, 민주의 마음도 제 자리로 돌아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내 눈길을 잡아끌었던 것은 ‘소금꽃 피었네, 갯골로 소풍가자!’라는 문구가 아니라 눈부시게 하얀 꽃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모습을 담아낸 포스터였다. 몇 달 째 공강 시간마다 사거리의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크로키를 연습하고 있지만 도심에서 하는 크로키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변화가 필요해.”
쥐고 있는 연필을 내려놓은 내 입에서 자연스러운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처음 창가 자리에 앉았을 때에는 하나하나가 특별해 보였던 사람들의 복장이나 표정들도 몇 달이나 크로키를 계속 해 온 지금은 모두 엇비슷해 보인다. 다들 뭐가 그렇게 피곤한 걸까. 조금 더 다양하고 생기 넘치는 표정들을 그려보고 싶었는데, 미소를 띤 채 걷는 사람들을 찾기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을 기다려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한 자루만을 가방에 챙겨 넣고는 집을 나섰다. 가방이 가벼워서 그런지 아니면, 오랜만에 가보는 지역 축제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역시나 갯골생태공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코스모스 꽃길도, 갖가지 재미있는 모양을 한 조형물들이나 염전도 아닌 축제를 방문한 사람들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메고 있는 가방에는 분명히 도시락이나 카메라 같은 오늘을 위한 준비물이 들어있을 것이다. 각자 세운 나들이 계획만큼이나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그리기 위해 당장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들고 싶었지만, 일단은 공원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코스모스 길을 따라 걸었다. 초가을인데도 갖가지 색깔의 코스모스가 공터에 한가득 피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아이들의 웃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표정이 다양한데다가 어떤 표정을 지어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크로키 대상이지만, 대학교 근처에서는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나는 아이들 한 무리를 데리고 소풍을 나온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기분으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모래 대신 하얀 소금이 깔려 있는 놀이터 한 구석에 있는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그저 열심히 놀다가 기운이 빠져 잠시 앉아 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망대에 올라 갯골생태공원의 전경을 감상하고 내려온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고는 불안한 마음에 말을 걸었다.
“얘, 혹시 엄마를 잃어버렸니?”
아이가 도리질을 했다. 엄마가 잠시 풍경 사진을 찍으러 다녀오실 동안 오빠와 놀고 있으라고 했는데, 또래 아이들을 만나 신이 난 오빠가 자신을 놀이에 끼워 주지 않는단다. 아이가 손가락질 하는 곳을 바라보자, 초등학교 사오 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노는 가운데서 아이와 꼭 닮은 짱구머리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가 혼자 다른 곳으로 가 버리면 그대로 미아가 될 터였다. 나는 잠시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로 결심하고는 아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언니, 화가예요?”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스케치북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화가는 아니고 화가 지망생이지, 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려다가 그냥 유명한 화가라고 거짓말을 해 버렸다. 아이는 설레는 눈빛으로 빈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다가는 자기 얼굴을 그려 달라며 내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사진관에 갔을 때처럼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은 아이를 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어린아이를 그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아이들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어느 새 내 주변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다음은 자기 차례라며 티격태격하다가도 또 웃는다. 웃음꽃이 피었다. 아이들의 소매며 바지 자락에 묻은 소금꽃들도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눈 깜짝할 새에 또 신년이었다. 맥주 한 캔을 사 와서 안주 없이 마시며 텔레비전으로 제야의 종 치는 걸 구경했다. 혹시 핸드폰이 울리지는 않는지 계속 확인 해 보았지만 별다른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들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차 때문이니 어쩔 수 없지. 혼잣말을 하며 이어지는 축하 무대를 본다. 벌써 삼 년 째 혼자 맞는 신년이었다.
“이런 호수 말고, 애들이 빨리 바다를 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내가 농담처럼 꺼낸 한 마디가 시작이었다. 우리 부부 모두 대학을 나오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이래저래 불편한 점도 많았고, 서러운 경우도 많이 당했었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 계획을 준비한 듯, 일사천리로 서류 준비를 끝내고 아이들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입버릇처럼 ‘우리 애 교육만은’하고 되뇌었었는데, 막상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보낼 때에는 그 앞에서 펑펑 울지 않은 게 용하다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부럽지 않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기로 신혼 때부터 약속해 온지라, 떠나는 가족들 앞에서 서운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나는 그렇게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새해 아침에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호숫가로 나섰다. 날이 꽤 추워 현관문을 열면서부터 옷깃을 손으로 꽉 여미고 나섰는데, 막상 나서보니 맑은 공기가 상쾌했다. 며칠 째 내리던 눈도 이제는 모두 그친 모양이었다.
가족 단위로 호수를 보러 마실 나온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나 많았다. 호수의 얼음 위를 걸어보겠다고 조심스레 한 발짝씩을 내 딛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이 부모 손에 매달려 웃는 모습을 보니 코끝이 아려왔다. 우리 아이들도 딱 저만할 텐데. 아니, 못 본 지 삼 년이나 되었으니 아마 머리 하나는 더 자랐을 것이다. 서러워하지 않기로 했는데, 외로움은 내 힘으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호수에 눈이 덮인 모습이 마치 저 멀리 남극 대륙에 온 것 같았다. 그 신비로운 모습을 렌즈에 담으려 애쓰는 남자도 보였다. 저 앵글 속에 내가 들어간다면 안성맞춤일 것이다. 목을 움츠린 내 모습은 펭귄을 닮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가족으로서의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약이다. 하지만 수 년 간 쌓여 온 외로움이 사람을 점점 더 비관적이게 하고 있었다.
혼자서라도 떡국을 끓여 먹어야 하나, 친구를 만나 볼까.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져 있는데, 저 멀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비닐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내 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곳이라더니, 철새들이 먹을 모이를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다가가 보았다.
“저어, 저도 한 번 해 볼 수 있을까요?”
그들은 선뜻 준비되어 있던 봉투들 중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며 요령을 알려준 뒤, 제각기 몇 마디씩을 건넸다.
“겨울이니 청둥오리나 쇠오리, 쇠기러기 같은 녀석들이 찾아 올 거예요.”
“여기 사는 녀석들도 아니고, 한 철 잠시 다녀가는 녀석들이지만 반갑게 맞아 줘야지.”
나는 그들이 모두 외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들도 어딘가에 돌아올 사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들의 길목에 서서 다른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언 땅에 모이를 흩뿌렸다.
벚나무 가지에 쌓여 있던 눈이 머리 위로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나는 이른 봄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벚나무 밑에 서 있었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벚나무에서는 꽃잎이 흩날릴 것이다.
엄마한테는 짭조름한 냄새가 난다. 그것은 땀 냄새도 아니고 엄마 한테서만 풍기는 엄마냄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슈퍼맘이나 워킹맘이라는 단어가 선풍적으로 쓰인 때가 있었다.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엄마들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슈퍼우먼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며 우리 엄마가 슈퍼맘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로 자식들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슈퍼맘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슈퍼맘의 길에 접어들었겠지만 우리 엄마는 등 떠밀려 슈퍼맘이 되어야했다.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공부시키려고 엄마는 참 열심히 일했다.
처음부터 식당을 개업한 것은 아니었다. 동네의 조금 큰 한식당에서 주방 설거지를 하고 홀 서빙 일부터 시작했다. 식당이 문을 여는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식당이 문을 닫는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손은 항상 부르트고 거칠었다. 사실 엄마와 같이 살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은 거의 없었다. 학교에 가려고 일어나면 엄마는 이미 식당에 가신 후라 아침상만 덩그러니 있었고 밤에는 엄마를 기다리다 먼저 잠든 적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해를 더 식당에서 일을 한 엄마는 이듬해 봄에 작은 한식당을 열었다. 식당에서 음식판매뿐 아니라 반찬을 함께 팔기도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닮아 요리솜씨가 있다고 했다. 엄마는 음식에 있어서 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며 소금을 가장 깐깐하게 생각했다. 엄마는 메인 요리와 함께 나가는 밑반찬들을 직접 만들었으며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밑반찬이 깔끔하고 맛있다며 종종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계속 일을 고집하는 엄마에게 이제 그만 쉬라고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사람이 하던 일을 안 하고 집안에만 있으면 빨리 늙는 거라고 했다. 하긴 지금까지 엄마의 삶에는 조금의 쉼도 없었다. 늘 바쁘고 억척스럽게 살아왔던 삶이라 여유라는 쉼이 엄마에겐 어떤 것보다 낯설기도 할 것이다. 엄마의 삶을 봐왔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누가 짠돌이 아지매 아니랄까봐 자식농사 풍년인데 뭣하러 지금까지 고생이냐고 했고, 엄마는 “짠돌이 어디 가나요. 그러지 말고 계모임 같은 거 있으면 다른 식당 가지 말고 우리 식당으로 와요”하며 웃음만 지었다.
사람들은 엄마를 짠돌이 아지매라 불렀다. 엄마와 나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아마 짠돌이라는 별명에서 일 것이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용돈을 참 적게 주셨다. 그래서 돈을 아끼고 아껴야만 겨우 학교 준비물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학교 문구점에서 파는 100원 200원짜리 불량식품도 내겐 사치였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고등학교 때까지 내 별명은 짠돌이였다. 물론 지금도 짠돌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다. 지금은 여유 있는 생활을 할 만큼 벌이가 괜찮아 졌지만 여전히 돈을 허투루 쓴 적이 없다. 아마 나도 나이가 들면 엄마처럼 짠돌이 아지매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침부터 엄마가 분주한 걸 보니 반찬으로 나갈 배추겉절이와 오이소박이, 각종 나물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가끔 회사에 월차를 내는 날이면 엄마를 도와 반찬을 만들며 식당일을 돕는다. 엄마는 반찬을 만들 때에도 항상 ‘소금’의 중요성을 연설했다. 싱싱하고 좋은 재료만큼 음식의 풍미를 돋우어주는 소금의 선택이 맛을 좌우한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신안에서도 가장 좋은 천일염만을 고집했다. 나는 이런 좋은 소금 쓴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냐고 했지만 엄마는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입맛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법이라고 했다. 간 하나에 발길이 이어지고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칭찬과 쓴 소리가 좌우되는 것이라고 했다. 질 낮은 소금을 쓰면 음식이 텁텁하고 쓴 맛이 감돌며 질 좋은 천일염을 쓰면 깔끔하고 풍미 있는 깊은 맛을 낸다고 했다.
엄마의 고집은 소금만큼이나 짭짤했다. 질 좋은 소금을 써서 일까 사람들은 엄마의 음식솜씨를 칭찬했고 ‘짠돌이 아지매’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부쩍 많아졌다.
엄마가 일을 갔다 돌아오면 엄마 특유의 짙은 냄새가 났다. 엄마에게 풍기는 짭조름한 냄새도 질 좋은 천일염처럼 기분 좋은 엄마 고유의 냄새로 기억될 것이다.
사람은 얼마만큼의 기억을 얼마나 똑똑히 저장할 수 있을까?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를 통해 어떤 것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 4세 이하의 어린 시절은 기억에 없다. 아무리 기억을 해내려고 해도 머릿속은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기억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은 아마 어릴 적 모습을 담아둔 사진첩을 통해서 유추해 낸 단편적인 조각들일 것이다.
할머니의 기억력은 점차 감퇴되셨다. 처음에는 그저 노화의 한 부분이리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아이를 출산 하면 기억력이 조금 떨어져 자주 깜박깜박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 할머니는 열 두 남매를 출산 하셨으니 그럴 만도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할머니께서 노인성 치매를 앓고 머지않아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셔서 생각보다 빨리 하늘나라로 가버리셔서 그런지 엄마는 항상 도끼빗으로 머리를 콕콕 두드리시며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반복해서 읽으셨다. 그리고는 심심풀이라면서 고스톱으로 하루 점을 치시기도 하셨다. 화투가 치매예방에 좋다나. 엄마는 염려하는 것 보다 기억력이 좋았다. 어쩌면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은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엄마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서 말 타는 아저씨를 따라 갔을 때 입었던 초록색 멜빵바지를 다 기억하고 계실 정도였다.
그런데 엄마가 너무 정신건강에만 열중을 한 탓일까 엄마를 괴롭힌 병은 머릿속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엄마 몸속에 침투한 몹쓸 암덩어리. 엄마는 자궁암판정을 받았다. 의사도 엄마의 상태에 대해 급격히 나쁘다 혹은 호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등의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했고 일단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며 상태를 보자고 했다. 이렇게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아끌며 당장 수술이라도 하라고 악을 쓰고 싶었지만 의사의 지나친 냉담한 태도에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엄마는 다른 아닌 암이라는 말에 상심이 큰 듯했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없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 눈물이 날까 눈물이 나지 않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눈물이 나겠지로 생각을 마무리했지만 이렇게 막상 엄마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조그마한 눈에 눈물이 넘치도록 고였다. 엄마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집에 가서 입원을 위한 옷가지 몇 벌과 생활필수품들을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당신 마음도 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나머지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대뜸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바다를 갈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가까운 갈치호수로 엄마를 모셨다. 엄마는 한동안 호숫가를 바라다보았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실까? 현재 엄마의 상황에 대한 원망의 생각일까 아니면 벌써부터 드는 두려움일까 혹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엄마, 괜찮아. 항암치료 받으면 암세포도 줄어들고 수술하고 나면 싹 다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마음 굳게 먹고. 응?”
“응”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난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하나도 안 무서워.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어. 긍정적인 생각들만 하라고.”
“그래. 할머니가 보고 싶네, 갑자기.”
“갑자기 할머니는 왜. 자꾸 슬픈 소리만 할 거야? 그러지 말고 우리 저기 간장게장 집에서 맛있는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어차피 병원 들어가면 밍밍하고 싱거운 밥들만 계속 먹어야 할 텐데 오늘까지는 먹고 싶은 거 먹고 들어가서 열심히 치료받자, 응?”
“낙조가 보고 싶은데, 반월호수로 가자. 거기 가서 해 지는 것만 보고 들어가자.”
싫다는 나를 이끌고 엄마는 굳이 반월호수로 옮겼다. 마침 어둑어둑 해지더니 금세 해가 저물었다. 어쩐지 슬픈 기운이 엄마와 나 사이를 감도는 것 같아 집으로 가자고 하려던 차에 엄마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떼었다.
“엄마, 잊어버리지 마. 그리고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잊어버리지 말고 다 기억해줘.”
“엄마 정말 이럴래? 자꾸 왜 슬픈 얘기만 하는 건데?”
나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도 흐느껴 우셨다. 해가 진지 오래되었지만 엄마와 나는 잊지 않으리라는 약속만 되풀이하며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화초를 가꾸는 일을 그만두라 하였더니, 어머니는 꽤 서운하신 모양이었다. 이제 육십 대 후반 줄에 들어서신 어머니는 요즘 들어 허리며 어깨며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더운 날씨에 화단의 꽃들을 가꾸느라 몇 시간씩을 땡볕에서 보내시니, 옆에 붙어 있지도 못하는 딸자식은 답답할 따름이다. 봄이면 봄꽃 축제, 여름이면 장미 축제, 가을이면 가을꽃 축제, 겨울이면 눈꽃 축제가 열리는 이 꽃다운 곳에서 왜 굳이 어머니까지 직접 꽃을 키워야만 하는가.
집에 들를 때마다 이제 그만하시고 집에 가만히 좀 계시라 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에, 이번엔 단단히 화를 내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등을 돌리고 앉아, 옷자락만 만지작거리고 계셨다. 그 모습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 싫어, 나는 나도 모르게 또 짜증을 내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 몇 달이나 집에 들르지 못했던 나는, 어머니로부터 사진이 첨부된 문자 한 통을 받았다. 휴대전화를 사 드린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오타가 가득한 어머니의 문자는 여전했다. ‘언제’가 ‘ㅇ너제’, ‘엄마’가 ‘어마’로 표기된 문자와 몇 분 동안이나 씨름했지만, 도대체 전문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 엄마 참 여전하구나.”
나는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어머니가 보낸 흔들린 사진 속의 피사체가 대체 무엇인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당장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진 속에 꽃이라고는 단 한 송이도 없는 빈 화단의 모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이게 뭐야? 꽃들 다 없애버린 거야? 누가 이렇게 다 없애버리라고 했어, 조금만 덜 고생했으면 좋겠다고 했지.”
나는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할 말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목소리는 뜻밖에 밝았다.
“아이고, 얘. 그 귀한 것들을 없애기는 누가 없앴다고 그래? 네가 화초 키우지 말랬지, 어디 갖다 버리라고 했느냐?”
내게 보여줄 것들을 잔뜩 준비했다는 어머니의 들뜬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오랜만에 집으로 향하며 나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와, 이게 다 뭐야?”
어머니는 마른 꽃을 인쇄하듯 한지에 박아 넣어 만든 공예품들을 하나둘씩 꺼내 보이셨다.
“이것 봐라. 꽃 가꾸는 것까지 그만두고는 집에 혼자 있기가 영 적적하고 해서 뭐라도 배워볼까 했더니, 이런 게 있지 뭐니. 이게 다 내가 요 앞에 있던 꽃으로 만든 거야. 신기하지 않어?”
꽃이 눌러 담긴 전등갓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아래로 꽃이 눌러 담긴 부채가 펼쳐졌다. 노란 백열전구 불빛에 비치는 줄기가 뻗은 모양새며 이파리의 맥들, 꽃잎들의 조화가 마치 그림 같았다.
“누른 꽃이라구 해서, 이걸 압화라고 한단다.”
“이걸 정말 엄마가 만들었단 말이야?”
내가 어머니의 압화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어머니는 장롱 아래서 오래된 앨범을 하나 꺼내 펼치셨다. 앨범 속에는 화단 앞에 앉아 웃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너도 어렸을 때에는 이 꽃 가꾸는 걸 참 좋아했는데 말이야. 인제는 나 혼자 꽃을 키운다는데도 그렇게 성을 낼 건 또 뭐니. 다들 떠나고 나 혼자 이 집에 있으려니까 꽃이라도 예전처럼 가꿔볼까 한 건데.”
어머니는 채송화에 코끝을 갖다 댄 열두어 살의 내 사진을 한참이나 쓸어 보셨다.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다시 원룸으로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머니는 미안해하는 내 표정이 영 어색하신지 금세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야아. 그래도 다 늙어서 혼자 화단 가꾸려니까 힘들기는 하더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여기 가만히 눌러 담아 두기로 했지.”
나는 가방을 열고 책장을 펼쳤다. 어머니 몰래 눌러 담아 온 사진 한 장이 가로등 불빛에 가만히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