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단종께서 유배령을 받은 지 꼬박 닷새만이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 겨우 주천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단종께서는 심신이 매우 지친상태로 보여 걱정이 됐다. 겨우 12살인 단종. 역사는 어린나이에 숙부에게 왕의 자리를 내어주고 유배령을 받은 비운의 왕으로 기억할 것이다.
단종께서는 많이 지치셨는지 입이 바싹 말라있었다. 마을을 둘러보기도 전에 물 한 모금을 청할 곳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가를 발견하고 단종은 물 한 모금을 겨우 마시며 지친 몸을 풀어야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유배 행렬은 다시 이어졌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고 험준한 산을 올라야 했다. 행렬을 뒤따르는 우리는 물론 단종께서도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으나 단종께서는 고갯마루에 다다르자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세상에 어떤 왕이 자신을 위해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며 흙바닥에 큰절을 올릴 수 있을까. 단종은 그저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는 것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마침내 낡은 나룻배를 타고 외딴 섬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청령포라고 불리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에게는 수라를 올릴 궁녀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울창한 소나무 숲뿐. 단종께서는 소나무로 우거진 섬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정순왕후의 걱정을 먼저 하였다.
우리는 급하게 밭에서 옥수수와 메밀로 수라상을 올렸고 우리가 청령포에 도착한지 5일이 지난 후에야 궁녀4명이 도착하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더 지나도 단종께서는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였다. 한양에 남겨둔 정순왕후 때문이리라. 단종께서는 종종 뒷동산에 올라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탑을 세우곤 하였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한 설움과 미안함으로 단종은 자주 눈물을 보였다.
그런데 이곳의 생활도 그렇게 길지는 못하였다. 홍수가 나 거처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풍헌으로 유배지를 옮기자마자 한양으로부터 사약을 받으라는 명이 들려왔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한없이 많은 슬픔을 간직한 왕, 나의 왕이 죽음을 맞았다.
차마 슬픔으로 가득한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고 동강에 버려졌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고자 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포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왕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신하로서의 예도 다하지 못하다니.
쉽사리 누구 하나 나서는 이 없던 그때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소식을 전해왔다. 단종의 시신을 자신이 거두겠다는 것이다. 그의 단호한 전갈에 마음이 저려왔다. 진작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기 때문이리라.
급히 동강에 버려졌던 왕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엄흥도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단종의 시신을 거둔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전갈이 도착했다. 엄흥도가 생을 마감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또 한 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엄흥도는 그는 무심하게 솟아오르는 소나무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여전히 나의 왕 그리고 우리의 왕을 영원히 지키리라.
어렸던 내게, 할머니들은 내 부모님이 용을 타고 멀리 떠나셨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주 훌륭하신 분이었다 한다. 강직하고 정의감 넘치는 성격의 아버지와 온화하고 정이 많은 어머니. 모두들 자신의 부모를 더러 이렇게 묘사하곤 하지만, 내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 그러니까 그게 얼마만큼의 훌륭함이냐고 하면, 이십 여 년 전의 교통사고에서 두 분의 몸으로 나를 끌어안아 내 목숨만을 구하고 돌아가셨을 정도. 딱 그 정도의 훌륭함이다.
부모님께 ‘감사’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다. 아마 부모님의 훌륭함이 내 성격에까지 번져 오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6년 보다는 많은 시간 말이다. 부모님과 함께 한 시간이 짧아서인지 나는 좀처럼 부모님의 얼굴이나 성함을 기억해내지 못했고, 대신 고아로 지내 온 시간 동안 견뎌야 했던 숱한 아픔들을 기억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내 생의 대부분을 부모님을 원망하는 데에 쏟았다.
“야가 또 뭘 하고 있노, 퍼뜩 좀 온나.”
“아이구, 사돈. 좀 천천히 가요. 노인네가 무슨 걸음이 그리 재답니까?”
나는 두 할머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란히 굽은 할머니들의 등이 보였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나는 이 두 분의 손에 자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식을 한 날 한 시에 잃은 두 분은 이십 여 년을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 오셨다. 자식을 잃은 아픔도, 엇나가는 손자에 대한 아픔도 함께 나누어 오셨던 것이다.
“천천히 가요, 차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어요.”
내 말에 뒤를 돌아본 할머니들이 곧바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시다 다시 고개를 돌리셨다. 오늘은, 할머니들의 품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날이다.
이십 여 년. 누구도 짧다고는 말하지 못할 그 세월 동안 두 분의 할머니는 매주 이 산길을 오르셨다. 슬픔을 이기기 위해,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내 이름의 끄트머리와 같은 글자를 쓰는 절을 찾아 시작한 산행은 이제 두 분의 낙이 되었다. 그 이십 여 년 동안 한 번도 할머니들을 따라 이 길을 오른 적이 없다니, 나도 좋은 손자는 아니라는 생각에 새삼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산 중턱의 너른 터를 너머로 지붕을 환히 펼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둥그런 산의 능선들과 어우러진 사찰의 모습이, 마치 작은 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울리는 풍경 소리가 귓가에까지 와 닿았다. 화려함도 떠들썩함도 없는 절을 왜 그렇게들 찾아가나 했더니, 이 따뜻하고 향기로운 분위기 때문이었나 보다. 두 할머니는 석탑 앞에서, 또 불상 앞에서 끊임없이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셨다.
“뭘 그렇게 비시는 거예요?”
“뭐긴, 이놈아. 다 너 잘 되라고 비는 거지. 이십 년 동안 빌었으니 이제 곧 지문이 닳겠어.”
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봐라, 여기 우리가 서 있는 데가 용이 웅크린 자리다. 옛날에 이 산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올랐다고 하는데, 원래는 열 마리가 있었다고 하데. 혹시 아나. 니가 그 마지막 용을 타고 하늘에 오르게 될지 말이여.”
“그렇게 오래 마음고생을 하며 웅크려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서러웠겠노. 우리가 그 마음을 다 용한테 맡겨 놨다. 이제 훨훨 나는 일만 남은 것이여.”
나는 아리송하고도 복잡한 마음으로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들은 내게, 부모님이 용을 타고 떠나셨다고 했다. 저 멀리 구름 너머로, 춤추듯 너울거리는 용의 등허리를 타고 가셨다 했다. 이제 내게 용을 타고 떠나라 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들은 아직 그녀들의 자식을 보내지 않으신 것이 분명했다.
“용진이 니도 용 허리 한번 타그라. 근심걱정 다아 용한테 맡기고, 니는 그냥 훨훨 날아가그라.”
그 때, 할머니들의 미소 아래로 오래 된 이야기 속의 용들을 보았다. 쉬이 보지 못할 곳, 너무 멀어 쉽게 닿지 못할 곳에서 할머니들의 소중한 보물을 끌어안은 용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작은 원을 그려보았다. 손끝을 따라서 동그란 원이 그려졌다. 그리고는 나무를 향해 말했다.
“나는 일곱 살이야. 너는? 너는 나이가 많으니?”
그리고는 밟아도 소리 나지 않고 발이 푹푹 빠지는 아주 고운 모래에 다시 동그마니 원을 그렸다. 손끝을 따라 그려지는 원은 모래에 나이테가 그려지는 듯 동그랗게 또 동그랗게 그려져 나갔다. 여러 개의 원이 모이니 톱니바퀴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린근원의 손끝에 흐르는 동심원은 점점 더 퍼져나갔다.
근원은 등산화 끈을 조금 당겼다. 오늘은 등산 동호회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A, B팀으로 나뉘어 각자 배정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근원은 A팀에 배정되었고 아침으로는 김밥과 음료수, 물이 주어졌다.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로 버스를 가득 메웠고 근원은 홀로 창가쪽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데 오늘의 사회자로 나선 남자가 마이크를 잡으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근원은 목적지까지 조용히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대다수의 입장에 반기를 들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신경을 다른 데로 쏟기 위해 근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시집을 꺼내들었다. 친구 따라 얼떨결에 한두 번쯤 나가본 시사랑 동호회에서 추천받아 사게 된 시집이었다. 시를 잘 모르는 그였기에 어쩌면 시를 더욱 잘 읽고 느낄 수 있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노송’이라는 제목의 시가 등장했다. 8줄 내외로 간략하게 쓰인 시에는 늙은 소나무에 대한 작가의 영감이 손끝을 타고 강렬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읽기 어려운 점이 없었음으로 근원은 비교적 잘 쓴 시라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한번 읽고 밀려오는 졸음에 정신을 내어주고 목적지까지 다다랐을 그였지만 근원은 자신이 시를 쓰는 작가라면 늙은 소나무를 가지고 어떤 시를 써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읽었던 시가 머릿속에 맴돌아 근원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근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몸짓이었다.
‘늙은 소나무라. 소나무는 원래 좀 늙지 않았나? 어디를 돌아다녀보아도 1,2년 된 소나무는 거의 못 본 것 같은데. 한 400년쯤은 되어야 하지 않나?’
근원은 속으로 속삭였다. 속으로 말하는 것이라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근원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도착 10분 전입니다. 오늘 저희가 가기로 한 곳은 산이 아니라 트레킹 코스이기 때문에 크게 힘든 점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므로 단단히 준비하시고 내리셔서 일사분란하게 모여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소나무가 정말 예술입니다.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하니까 그곳에서 사진 찍으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제 차가 멈춰서면 내리세요.”
사회를 맡았던 남자는 도착 10분전을 알리며 깔끔하게 정리멘트를 보냈다. 근원도 잠시 생각을 접고 내릴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모처럼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 따라 물 따라 걷는 트레킹 코스였다. 사회자 남자의 말에 의하면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했다. 남자는 차안에서 읽은 시를 떠올렸다.
날이 맑아서인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리 동호회 사람을 제외하고도 많은 인파가 색색 깔의 등산복을 입고 소나무 숲길을 걷기위해 몸을 풀었다. 간단히 준비운동을 한 뒤 각각 흩어져 걷기 시작했다. 송림이 우거진 숲에 다다르자 길게 뻗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그 자태를 뽐내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고 근원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소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오백년 된 늙은 소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노송이라’
근원은 머릿속에 시를 그려나갔다.
늙은 소나무
너는 말없이 늙어있구나
너의 늙음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너의 몸에 동그라미를 그려나갔구나
지나간 세월만큼 너는 늙어있구나
굵은 기둥은 단단하고
네 몸뚱이에서 풍겨오는 짙은 냄새가
너의 늙음을 대신하는 구나
근원은 다시 한 번 흙바닥에 동그마니 원을 그려보았다. 어린 근원이 모래바닥에 작은 동심원을 그려 넣듯이 늙은 소나무 앞에서 동심원을 그려나갔다.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빛처럼 어둑한 날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다. 차마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는 분이니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다가 조금은 진지하게 묵례를 했다. 가볍게 바람이 일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내가 선생을 이토록 추억하는 건 선생에 대한 감사와 존경도 있겠지만 생각이 가진 무게와 선생이 늘 지니고 있던 칼의 무게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나라의 한 국민이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가 그 기다란 칼 하나에 온 백성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기에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생각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하루에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것이고 그것은 단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백성들의 목숨이고 이는 한 가정의 기둥의 목숨이기 때문에 늘 고뇌에 차있고 누구보다 두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눈을 뜨고 감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고 말 한마디에 수백만의 목숨과 나라가 달려있었기에 태산 같은 두려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으리라.
그래도 그가 그의 삶을 다하는 순간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긴 칼로 누구를 벨 것인가. 내가 베고 있는 것이 적장의 목숨일까 혹 자신의 삶이 아닐까 선생은 하루에 수도 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직분을 숙명처럼 고스란히 받아냈다.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갑옷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고 고된 삶 때문에 선생은 지친 몸을 뉘일 때도 차마 그 짐을 내려놓지 못했다. 언제든 일어나 적과 맞설 수 있도록 갑옷을 입고 칼을 옆에 두었을 것이다.
날이 점차 밝아졌다. 조금은 무거운 바람이 일자 대나무 숲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늘 한적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고 조용했다. 짙은 안개가 발아래 깔린 것만큼 진중하여 숨소리 한번 내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다.
내가 가진 삶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무게는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이렇게 힘들어 하냐고 내 자신을 채찍질 하고 싶을 때 이곳을 찾곤 한다.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낼 때. 이곳을 찾아 그분을 생각한다.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아무런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음에도 이곳을 찾으면 큰 위로를 받곤 한다. 그분의 칼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
날은 이제야 겨우 한낮의 빛을 찾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친구의 전화다.
“어디야? 지금 너희 집 근천데 나올래?”
“나 지금 아산이야.”
“너 또 현충사 다녀오는 길이야? 너도 참 대단하다. 사실 장소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매번 갈 때마다 새로워?”
“장소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니까. 네가 뭘 알겠냐.”
“학교에서도 존경하는 위인하면 한결같이 이순신장군이라고 쓰더니... 그래서 언제 올라오는데?”
“지금 가는 길이야.”
다시 이곳을 찾을 때에는 내 삶의 무게에 대한 답을 들고 오고 싶다. 그리고 선생과 함께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사람은 얼마만큼의 기억을 얼마나 똑똑히 저장할 수 있을까?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를 통해 어떤 것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 4세 이하의 어린 시절은 기억에 없다. 아무리 기억을 해내려고 해도 머릿속은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기억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은 아마 어릴 적 모습을 담아둔 사진첩을 통해서 유추해 낸 단편적인 조각들일 것이다.
할머니의 기억력은 점차 감퇴되셨다. 처음에는 그저 노화의 한 부분이리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아이를 출산 하면 기억력이 조금 떨어져 자주 깜박깜박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 할머니는 열 두 남매를 출산 하셨으니 그럴 만도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할머니께서 노인성 치매를 앓고 머지않아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셔서 생각보다 빨리 하늘나라로 가버리셔서 그런지 엄마는 항상 도끼빗으로 머리를 콕콕 두드리시며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반복해서 읽으셨다. 그리고는 심심풀이라면서 고스톱으로 하루 점을 치시기도 하셨다. 화투가 치매예방에 좋다나. 엄마는 염려하는 것 보다 기억력이 좋았다. 어쩌면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은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엄마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서 말 타는 아저씨를 따라 갔을 때 입었던 초록색 멜빵바지를 다 기억하고 계실 정도였다.
그런데 엄마가 너무 정신건강에만 열중을 한 탓일까 엄마를 괴롭힌 병은 머릿속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엄마 몸속에 침투한 몹쓸 암덩어리. 엄마는 자궁암판정을 받았다. 의사도 엄마의 상태에 대해 급격히 나쁘다 혹은 호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등의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했고 일단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며 상태를 보자고 했다. 이렇게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아끌며 당장 수술이라도 하라고 악을 쓰고 싶었지만 의사의 지나친 냉담한 태도에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엄마는 다른 아닌 암이라는 말에 상심이 큰 듯했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없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 눈물이 날까 눈물이 나지 않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눈물이 나겠지로 생각을 마무리했지만 이렇게 막상 엄마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조그마한 눈에 눈물이 넘치도록 고였다. 엄마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집에 가서 입원을 위한 옷가지 몇 벌과 생활필수품들을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당신 마음도 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나머지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대뜸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바다를 갈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가까운 갈치호수로 엄마를 모셨다. 엄마는 한동안 호숫가를 바라다보았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실까? 현재 엄마의 상황에 대한 원망의 생각일까 아니면 벌써부터 드는 두려움일까 혹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엄마, 괜찮아. 항암치료 받으면 암세포도 줄어들고 수술하고 나면 싹 다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마음 굳게 먹고. 응?”
“응”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난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하나도 안 무서워.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어. 긍정적인 생각들만 하라고.”
“그래. 할머니가 보고 싶네, 갑자기.”
“갑자기 할머니는 왜. 자꾸 슬픈 소리만 할 거야? 그러지 말고 우리 저기 간장게장 집에서 맛있는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어차피 병원 들어가면 밍밍하고 싱거운 밥들만 계속 먹어야 할 텐데 오늘까지는 먹고 싶은 거 먹고 들어가서 열심히 치료받자, 응?”
“낙조가 보고 싶은데, 반월호수로 가자. 거기 가서 해 지는 것만 보고 들어가자.”
싫다는 나를 이끌고 엄마는 굳이 반월호수로 옮겼다. 마침 어둑어둑 해지더니 금세 해가 저물었다. 어쩐지 슬픈 기운이 엄마와 나 사이를 감도는 것 같아 집으로 가자고 하려던 차에 엄마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떼었다.
“엄마, 잊어버리지 마. 그리고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잊어버리지 말고 다 기억해줘.”
“엄마 정말 이럴래? 자꾸 왜 슬픈 얘기만 하는 건데?”
나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도 흐느껴 우셨다. 해가 진지 오래되었지만 엄마와 나는 잊지 않으리라는 약속만 되풀이하며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거실이 시끌시끌했다. 방 안에서 잠시 무슨 소린지 들어보니 손자가 어딜 놀러 가자고 조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 그냥 가고 싶은 데 가게 두지 그러냐.”
내 말에 며느리가 손사래를 친다. 학교에서 고장의 이름 난 장소에 가 보고 기행문을 써 오라고 했다는데, 글쎄 수혁이 고 놈이 용인하면 에버랜드 아니냐며 놀이동산에 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속촌에 가면 어떻겠냐는 며느리의 말에, 손자는 민속촌에 가겠다고 한 친구가 반에서 열 명이 넘는다며 싫단다. 며느리는 또 에버랜드도 반 친구들이 스무 명은 가겠다며 되받아치고, 실랑이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게다가 때마침 일터에서 돌아온 아들놈은 할아버지까지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실 수 있는 곳으로 다 같이 가자고 하니, 이것 참 큰일이다.
수혁이는 토라진 듯 방에 들어가 한참이나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다들 마음에 들어 할 거라면서 개선장군처럼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결국 주말에 나서기로 한 곳은 호박등불마을이었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일단은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를 묻자 수혁이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한다.
“여기가 호박도 유명하고, 등잔 박물관도 유명하고, 또 숯가마도 유명하대요! 그런데 전 은하초코기사단 가서 초콜릿 만들 거예요!”
“그건 안 돼. 엄마가 벌써 호박 떡케잌 만들기 체험 신청 해 놨거든.”
차 안에서 또 한 바탕 난리가 났다. 아들은 그냥 하하 웃는다. 시끌벅적한 것이 우리 집의 장점이기는 하다만,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이렇게 난리가 나니 늙은이로서는 귀가 아파 견디기가 힘들다.
내 행선지는 벌써 등잔 박물관으로 정해진 모양이었는데, 내가 적적할까봐 아들이 같이 가겠다는 것을 그냥 수혁이랑 수혁이 엄마 따라 가라고 보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혁이는 엄마랑은 말도 하지 않겠다며 호박등불마을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도 입이 비쭉 나와 있었다. 아들이 가서 중재를 해 주지 않으면 기껏 신청했다던 체험 학습도 다 망치고 올 판이었다.
호박등불마을 체험장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등잔 박물관이었다. 체험장으로 들어가는 수혁이와 아들 내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등잔 박물관으로 향했다. 등잔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수십 여 년 전 쯤에 어머니는 호롱불을 밝히고 바느질을 하셨다. 따뜻하게 데워진 아랫목에 어린 아들을 소중히 뉘이고 밤이 늦도록 다소곳하게 앉아 옷감들을 매만지셨다. 이제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새삼스럽다. 물론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수혁이와 며느리가 투닥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종종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생각하고 감정이 북받쳐 오를 시기는 진즉에 지났다. 다만, 호롱불 아래 일렁이던 어머니의 그림자와 고운 옆모습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장승과 연못가의 석탑을 거쳐 걸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괜히 뒤를 돌아다보며 혹시 수혁이랑 아들 내외가 시간 저편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내가 등잔불 아래의 열 살 배기로 돌아가 버린다면, 지금 저 귀여운 열 살 배기도 사라져버리겠지. 웃음이 나왔다. 암, 할애비는 그냥 수혁이 할애비지.
씩씩하게, 하지만 느린 걸음으로 박물관을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냄새가 시간을 건너온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박물관 앞마당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만치서 수혁이가 달려와 입에 뭘 쑥 넣어준다.
“할아버지, 내가 만들었어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며느리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하고 쫓아오는 통에 수혁이가 도망을 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껄껄 웃었다.
오늘은 동호가 좋아하는 음악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특별히 음악실에서 수업을 하기 때문이지요. 동호는 특별히 음악수업을 좋아하였습니다.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자리를 정돈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음악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수업을 시작하셨지요. 교과서를 보니 오늘은 판소리에 대해 배우는 날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뜸 아이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카세트테이프를 틀었습니다. 그러자 테이프에서는 예전에 들어본 적 있는 판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머리가 주뼛거리고 이상한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수업이 지루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한 판소리보다 뮤지컬이나 오페라가 더 좋다고 삐죽거렸지요. 하지만 동호는 친구들의 의견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날 때까지 판소리의 여운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동호는 가방도 푸르기 전에 판소리에 대해 검색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오늘 수업시간에 들었던 신재효 선생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밤이 되고 동호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동호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의 주변은 온통 상투를 튼 사람들과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리고 한 고즈넉하게 자리한 초가집에서 낯익은 얼굴의 할아버지가 나왔습니다.
바로 동호가 오늘 공부한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 선생이었지요. 반가운 마음에 동호는 선생께 알은체를 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이렇게 만나 뵙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선생님께서 판소리 여섯 마당을 엮으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이놈, 네가 나를 어찌 아느냐. 소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 것이냐.”
동호는 신이 나 신재효 선생 앞에서 그날 배운 판소리와 동호가 느낀 소리에 대한 마음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재효 선생도 그런 동호가 기특했는지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동호는 꿈속인지 아닌지 신재효 선생 뒤를 따라 다니며 직접 소리에 대한 진심을 배우고 우리 소리에 대한 마음을 배웠습니다. 동호가 아는 단순한 판소리의 지식이 아니었지요.
따르릉 울리는 전화소리에 동호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깬 동호는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신재효 선생님을 만나 몇날 며칠 판소리를 배우던 것이 모두 꿈이었던 것이니까요.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 너무 생생하였던 동호는 당장 고창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신재효 선생이 머물던 고택에 도착하였지요.
꿈에서 보던 초가집이 그대로 있고 꿈속에서 선생과 함께 배우던 것들과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꿈속에서 선생과 함께한 집안 곳곳을 둘러보던 중 이상한 증표가 하나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호가 꿈속에서 몰래 남긴 흔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동호는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혼란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꿈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찡한 무엇인가가 느껴졌지요. 그것은 음악수업시간에 판소리를 들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였습니다.
동호는 신재효 선생이 밟았던 길을 밟고 싶어졌습니다. 한참을 고택에 머물던 동호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의 소리를 찾기로 한 동호의 마음속에는 선생의 소리의 한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습니다.
사 년 차 커플. 남들은 그 쯤 되면 서로에게 질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악담을 농담처럼 건네지만, 우리는 결혼을 생각할 만큼 진지했다. 새내기 때부터 사귀기 시작 해 내가 입대를 하고, 제대 할 때까지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권태기가 오는 것을 걱정하기에는 이미 잔뼈가 굵어진 사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특별한 곳에 가고 싶어.”
밥을 먹다가 무심하게 한 마디 툭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그 말에 민주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민주는 눈에 띄게 짜증이 많아졌고, 우울해 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민주의 이런 태도를 이별을 준비하는 여자의 태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군대에 다녀오면 남자가 여자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민주는 내가 군대에 가기 전보다 훨씬 더 예쁘고 어른스러워졌다. 물론 외모나 성격 때문에 민주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게 민주는 우리가 함께 해 온 모든 시간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민주를 데리고 부산으로 향했다. 민주는 이제 가 볼만 한 곳은 다 가 보지 않았느냐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민주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저 오늘 내가 준비한 풍경이 민주가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기만을 빌었다.
민주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광안대교가 잘 보이는 민락 수변공원이었다. 벌써부터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는데, 민주는 또 그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으냐고 하며 화를 내는 통에 애를 먹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겨우 돗자리 하나를 깔고 자리에 앉았다.
“이 먼 데까지 와서 쉬지도 못하고 여기 있자고?”
나는 조금만 기다려 보라며 민주를 달랬다. 뭐가 민주를 그렇게나 짜증나고 화나게 만드는 것일까.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져 버렸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우리 둘 사이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처음 사귀었을 때를 생각하며 기차 안에서 건네주었던 인형은 가방 안에 처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에 민주는 토이 크레인에서 인형을 뽑아다 주면 어린 애처럼 하루 종일 그것을 안고 있곤 했었다. 이제는 그런 사소한 것들도 모두 변해 버린 것이다. 괜스레 장난을 치려다 민주의 화만 더 돋우게 된 나는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축제가 시작 되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 입을 열면 민주는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말을 할 것이다. 헤어지자는 그 말을 말이다. 나는 민주를 보며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성준아, 나 할 말이 있어.”
그 순간, 첫 불꽃이 터졌다. 민주의 다음 말은 불꽃이 터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성에 묻혀 버렸다. 나는 놀란 얼굴로 꽃처럼 피어나는 불꽃을 바라보는 민주를 꼭 안아 주었다. 민주는 봄날 캠퍼스에서처럼, 나를 첫눈에 반하게 했던 그 순진하고 예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민주는 내가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고 외쳐버렸던 것을 들어버렸을까.
민주가 특별한 곳에 가고 싶다고 했던 그 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지난 사 년 동안 우리가 갔던 모든 장소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민주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 가장 사랑했던 시간을 새롭게 기억하도록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어느 사진 속에서나 민주는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런데 수천 장의 사진 중에서 딱 한 장,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다. 서울 불꽃 축제에 갔다가 길을 잃어 불꽃은 구경도 하지 못하고 돌아온 날의 사진이었다. 괜히 미안해하는 내게, 민주는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로 괜찮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민주는 딱 한 마디를 했었다.
“불빛이 춤추는 걸 보고 싶었는데.”
그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귀로 흘려버렸던 그 말들을 하나씩 맞추어 나가다 보면, 민주의 마음도 제 자리로 돌아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