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만 간다 하면 심통을 부리는 아들 녀석이 유달리 좋아하는 절이 있다. 바로 부산에 있는 해동용궁사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맞는 첫 여름방학을 기념하여 온 가족이 함께 바다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들렀던 곳이 바로 해동용궁사다.
나라고 해서 불심이 깊어 절에 가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불자이셨지만, 나는 전형적인 무교다. 내가 절을 좋아하는 것은, 교회와는 또 다른 빛깔의 화려한 색채들과 그윽한 향내의 조화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용! 용 있는 절! 용 사는 절!”
“어휴, 진형아. 조용히 좀 하자. 지금 가고 있잖아.”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차 안에서 소리를 질러 대는 진형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남편이 옆에서 ‘이제는 진형이가 당신보다 더 절을 좋아하게 되었다’며 웃었다. 사실 나는 오랜만에 비키니도 입어보고 싶고, 바다 절벽 위에 자리한 펜션에서 여유를 즐기고 싶은데 주객이 전도 되어 버린 기분이다.
남편이 취향이 워낙에 유치한지라 진형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함께 <드래곤볼>을 보았는데, 진형이는 여기 나오는 용신을 제일 좋아했다. 어린 아이가 보기에는 폭력적인 면이 없지 않은 만화영화라 걱정했었는데, 주인공이 지구를 구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커다란 용신이 멋있단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용 모형만 보면 사 달라고 떼를 쓰곤 했는데, 그런 진형이를 해동용궁사로 유인하기 위해 ‘그 절에 사실 용이 살고 있다’고 말한 것이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결국 다른 일정을 모두 제쳐 두고 용궁사를 제일 먼저 찾았다. 일부러 평일을 골라 왔는데도 주차장에 차들이 넘쳐나는 것이, 혹시 다른 엄마들도 다 나와 같은 거짓말을 해서 아이들을 데려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엄마, 빨리 좀 와! 엄마는 느림보야! 무천도사 같아!”
그게 누군지 묻기도 전에 진형이가 저만치 달려 나간다. 노점상에서 파는 씨앗 호떡 하나를 들려주어 겨우 진형이를 진정시키고 용궁사 가는 길을 올랐다. 같이 좀 말려 주면 좋을 텐데, 남편은 용을 외치며 방방 뛰고 있는 진형이가 그저 귀여운 모양이었다. 용궁사 가는 길에 있는 십이지상 앞에서 원숭이띠를 찾아 사진을 찍어 주니 또 좋아 죽겠단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주인공도 원숭이라던데, 자기가 만화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보다.
두 번째로 오는 길인데도 이렇게 난리 법석인데, 초행길은 오죽했겠는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경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용을 찾고 있던 진형이가 없어져 울상이 돼 있는데, 대웅보전 앞에 서 있는 진형이가 보였다.
무엇을 보고 있나 했더니, 대웅보전 앞에서 꿈틀대고 있는 커다란 비룡상과 비룡이 쥐고 있는 여의주였다. 용이 좋다, 좋다 노래를 부르더니만 막상 눈앞에 있는 용을 보니 무서웠던지 뒷걸음질을 치던 진형이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진형이한테 가기도 전에 지나가던 어르신 한 분이 얼른 진형이를 일으켜 세웠는데, 진형이는 감사하다는 인사 대신 ‘드래곤볼!’하고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드래곤볼이라니! 얼굴이 새빨개진 나를 제외하고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는 남편까지도 저만치 서서 큰 소리로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그 당혹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백팔계단 초입에 선 득남상의 코와 배에 사람들의 손때가 잔뜩 묻은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궁사에 들러, 나도 옥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내려 주십사 하고 득남상의 배를 쓰다듬어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낳은 아이가 용궁사에서 용을 찾겠다고 신이 나 있으니, 정말이지 인간사란 알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이랑 진형이가 앞서 나가서 빨리 오라고 마구 손짓을 해 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형이가 조금 더 자라 용신을 믿지 않게 되면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물어오지는 않을까 불안해졌다. 아무렴 어떠랴. 지금 이렇게 즐거우니. 용궁사에서 날아올랐다는 용님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오늘도 곰과 호랑이는 아옹다옹합니다. 서로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며 형님이라고 부르라는 것이지요. 곰은 단군시대부터 호랑이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고 호랑이는 한반도가 호랑이 형상을 띄고 있으니 자신이 곰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곰과 호랑이의 싸움을 보다 못한 밤나무가 제안을 하나 하였습니다. 우리 마을 숲속 동물친구들 앞에서 공주에 전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동물이 형님이 되는 것이었지요.
곰과 호랑이 둘 다 밤나무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다음날 정오가 되자 밤나무 주위로 동물 친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밤나무를 사이에 두고 빙 둘러앉은 동물친구들도 곰이 이길지 호랑이가 이길지 의견이 분분하였지요.
먼저 곰이 어깨를 으쓱하며 나섰습니다.
“에헴,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아주 먼 옛날 연미산 강 건너에 홀로 외롭게 살고 있던 암곰 한마리가 있었어. 늘 외로움에 떨며 캄캄한 동굴 속에 살았지. 그런데 어느 날 강 나루터 근처에 나무를 하고 온 나무꾼이 목을 축이려고 강가로 내려오는 게 아니겠어? 물고기를 잡으러 강가로 나갔던 암곰이 글쎄 그 나무꾼을 데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캄캄한 동굴 속으로 들어갔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웠던 어부는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암곰이 자신을 헤치지 않고 먹을 것을 물어다 주고 살뜰히 대해주는 게 아니겠어? 그래도 나무꾼이 도망을 갈까 두려웠던 암곰은 동굴의 문을 굳게 닫고 열어주지 않았어.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무꾼은 조금씩 암곰에게 마음을 열고, 정을 나눈 암곰과 나무꾼은 자식도 낳고 오순도순 살았지.
쯧쯧쯧, 그런데 암곰이 사람을 너무 많이 믿었던 거야. 나무꾼이 인간세상을 그리워하는 줄 몰랐던 거지. 어느 날 암곰이 물고기를 잡으러 강가로 나간 순간, 나무꾼은 열린 동굴 문을 통해 통나무배를 타고 도망을 쳤어. 물고기를 잡다 장면을 목격한 암곰은 새끼 두 마리를 안고 나무꾼에게 도망가지 말라고 애원을 하였지.
하지만 나무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배를 타고 떠났고, 암곰은 자식들을 품에 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네.
어때? 구슬프고도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니 내가 저 호랑이놈보다 형님이 되는 것이 맞지!”
곰의 이야기가 끝나자 동물 친구들은 슬픈 이야기에 훌쩍거리며 곰이 형님이 되는 것이 맞지! 하며 곰의 편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호랑이도 질세라 크르렁 거리며 동물들 앞에 나왔지요.
“어허! 내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고! 다들 잘 들어봐.
옛날 계룡산에 한 중이 작은 암자를 짓고 도를 닦고 있었어. 그런데 절 밖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어? 문 밖으로 나가보니 호랑이가 고통스러운 소리로 울부짖으며 목을 바닥에 비비는 거야. 가까이 다가가보니 호랑이 목에 큰 비녀가 걸려 있었어. 스님은 고통스러워하는 호랑이의 목에서 비녀를 빼주었지. 호랑이는 고마움을 표하고 유유히 사라졌어. 호랑이가 다녀간 다음날 또 문밖에서 기척을 느낀 스님이 밖을 나가보니 어제 그 호랑이가 웬 처녀를 물어다 놓고 재빨리 사라지는 것이었어. 정신을 잃은 처녀를 방으로 옮겨 정성껏 돌보아 주었지.
정신을 차린 여자는 혼인을 앞둔 양가의 처녀였어. 저녁에 뒷간에 갔다가 정신을 잃었다고 하였지. 스님은 처녀를 본가에 데려다 주었지만 자신을 구하여 준 스님을 따라 불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내기를 소원하였어. 처녀의 어버이도 하는 수 없이 허락하였고 스님 역시 간곡한 청을 뿌리칠 수 없었지. 그렇게 처녀와 스님은 의남매를 맺고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열반에 올랐다는 군.
어때! 내 이야기가 더 흥미롭지 않아? 그러니 저기 저 곰보단 내가 형님이 되는 것이 옳아!”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동물친구들은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결국 투표로 진행하게 되었답니다. 호랑이 하나, 곰 하나. 그렇게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 표를 하나 남겨두고 호랑이와 곰의 투표는 동점이었지요. 마지막으로 표를 열어보니 호랑이와 곰 중간으로 기권이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곰과 호랑이의 승부는 오늘도 무승부가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로 공주 마을의 이야기 왕이 되기 위한 내기를 할까요?
옛날에 한 선비가 살았습니다. 이 선비의 머릿속에는 온통 과거시험에 대한 생각뿐이었습니다. 사실 이 선비는 과거시험만 벌써 일곱 번째 떨어지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여덟 번째 과거길에 오르는 것입니다. 선비의 꿈은 장원급제를 하여 어여쁜 색시를 얻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매번 낙방을 하고 말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께 절을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 문경쯤에 다다랐을 때였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목도 축이려고 주변을 살피었지요. 때마침 한 주막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달려갔지요. 그런데 매번 한양으로 갈 때 이 길을 지났는데 그 동안에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주막이었습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몸이 피곤하여 급히 따끈한 국밥 한 그릇과 탁주 한 사발을 시켰습니다. 며칠 동안 걷느라 지친 몸에 국밥 한 숟갈 들어가니 피로가 다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배가 부르고 몸을 추스르니 보니 이 주막이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주모를 불러 이 주막을 불러 물어보려고 하였지요.
"이보시오, 주모. 내 이 길을 벌써 여덟 번째 지나는 것인데. 이 길을 지나면서 단 한 번도 이 주막을 본적이 없다네. 이 주막은 언제 생긴 것이오?”
“아이고, 이 주막이 언제 생긴 것이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그저 이번에는 장원급제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주막을 들른 사람 중에 과거시험에 떨어진 사람이 없다는 소문은 들으셨답니까?”
“그것이 사실이오? 아니면 나에게 농을 하는 것이오?”
“어찌 감히 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선비님께만 알려드리는 비밀이니 이번 시험에는 꼭 장원급제 하십시오.”
그렇게 선비는 주모가 알려준 대로 서둘러 길을 나섰습니다.
주모는 이 주막을 지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나무에 앉아있는 노란머리의 새가 이끄는 길로 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장원급제를 할 수 있다고 하였지요. 그렇게 선비는 의심 반 믿음 반의 마음으로 큰 나무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큰 나뭇가지 위에 노란머리의 새가 앉아있는 것이었지요. 선비가 놀라 크게 소리를 내자 노란머리새는 날아오르더니 천천히 낮게 날아 마치 길을 안내하는 것 같았습니다. 선비는 신비로운 마음에 노란 새가 이끄는 곳을 따라 갔지요. 그런데 이 길은 선비가 매번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이었습니다. 선비는 의심스런 마음이 들었지만 주모를 믿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길로 가는 길은 경사가 높고 길이 험준하였습니다. 이렇게 흙을 밟으며 험한 길을 오르던 선비는 그동안 보지 못한 자연경관은 물론이고 천한 상민들의 고달픈 삶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특별한 비책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그 주모의 취기어린 한 마디에 우연으로 만난 새를 따라 온 것쯤이라고 생각하였지요.
그렇게 한양에 다다른 선비는 마음을 다잡고 시험지를 받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시험의 문제가 새를 따라 걸어온 길에서 보고 들은 상민들의 삶에 대한 것을 서술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비라면 마땅히 이 나라 백성들의 성품과 삶을 두루 알고 있어야 한다는 주제였습니다. 선비는 당황하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자신 있고 당당하게 생각을 써내려갔지요. 시험을 마친 그는 곧 장원급제를 하였고 고맙고 신기한 마음에 당장 그 주막을 찾아 고마움을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똑같은 자리에 그 주막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큰 돌 하나만이 놓여있었지요. 이 신기한 이야기가 입에 입을 타고 소문이 나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들은 모두 새도 쉬어간다는 이 길을 통하여 과거시험을 보러갔고, 이 길을 통해 시험을 보던 선비들은 줄줄이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농제는 농업 신인 신농과 후직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지내는 제사다. 선농제는 제왕의 왕도정치를 실천적인 권농책으로 강조해 일찍이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다. 예전에는 음력 1월인 맹춘에 지냈다고 했는데 지금은 너무 추워 파종을 못하기 때문에 개구리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 뒤의 좋은 날을 골라 시행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경칩이 지나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임금님께서 곧 친경(임금님이 직접 참여하는 행사)하시는 날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다. 올해는 음력 2월 9일 춘분에 맞춰 친경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 궁궐에서는 임금님 행차에 앞서 이것저것 준비에 바쁘다.
임금님께서는 지난해 춘경을 하시며 상언과 격쟁을 열어 이야기를 직접 들으셔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상언은 일반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글로 호소하는 것이고, 격쟁은 임금의 행차 중에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는 것인데 임금님께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문제 해결을 지시하기도 했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가뭄과 홍수를 겪고 있어 백성은 백성대로 굶주리고, 임금은 임금님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부덕 때문이라며 눈물을 보이시는 날이 많다. 그럴 때마다 임금께서는 신하들에게 거리낌 없이 말하라며 직언을 요청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민생을 살피기 위해 궁을 나서기도 하신다고 한다.
드디어 선농제의 날이 다가왔고 임금께서는 선농단이 있는 제기동으로 행차 하셨다. 올해도 가뭄이 심했다. 임금께서 하문하시길 “가뭄이 너무 심하다. 소나기가 내렸지만 안개가 끼고 흙비가 왔을 뿐이다. 기후가 이렇듯 순조롭지 못하니 벼농사 형편이 걱정되는구나.”라 셨다.
청계천을 따라 행차가 이어지고 동대문을 지나심에 들녘을 돌아본 뒤 말문이 막히신 듯. “날이 가물어 지력이 약해진 것을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원래 이 땅은 비옥한 편인가, 메마른 편인가?”라면 대언에게 물었다. “원래 이 땅은 메마른데다가 가물어서, 작년 홍수로 농사가 잘 안됐습니다.” 그러나 대언을 거짓을 고한 것이다. 원래 비옥한 땅인데 침통한 임금님의 용안을 본 그가 거짓을 아뢴 것이다.
선농단에 도착하신 임금님께선 풍요를 비는 선농제를 지내시고 하늘을 우러러 비를 내려 주십사 기우제를 지내셨다. 임금께서는 이농기의 가뭄과 여름철 홍수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생각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하늘에게 비를 내려 달라 빌고 또 빌었다. 선농제가 있는 오늘도 봄 가뭄으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선농제, 기우제가 끝나고 어느덧 많은 시간이 흘러 임금께서 서둘러 환궁해야 할 시간이 됐다. 임금님의 가마가 움직이는 순간, 거짓말처럼 하늘에서는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메마른 땅을 적셔주는 굵은 빗방울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백성과 신료들이 뛸 듯이 기뻐하며 너나 할 것 없이 춤추고 흥에 겨웠다. 하지만 많은 비로 땅이 질어져 임금님의 가마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겼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환궁하기로 했고 임금님의 수라상을 올릴 시간이 됐다.
하지만 임금님과 대신들 이외에 먹거리가 부족해 군관들이나 궁녀, 의원 등과 같은 궁인들은 먹을 게 없었다. 수라상을 받은 임금께서는 작년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과 궁인들이 배를 곪고 있는데 어찌 혼자만 수저를 들 수 있느냐며 수라상을 물리라 하셨다. 어의와 대신들은 임금님의 하면을 거둬 달라 간청했다. 임금님께서는 모두가 같이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셨지만 인근 백성들도 배를 곪고 있는 춘궁기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때 임금님은 선농제에 풍년을 기원하며 쓴 소를 보시고는 그럼 소를 잡아 물어넣고 끓여 다 같이 허기를 달래자 하셨다. 이윽고 대신과 많은 궁궐 사람들, 굶고 있는 백성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쇠뼈와 고기를 삶아낸 국물에 밥을 말아 많은 사람들이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백성들은 임금님에 대한 칭송이 더 높아졌다. 그 후 백성들을 생각하며 선농제를 지내고 경작에 쓰인 소를 잡아 선정을 베푼 임금님의 높은 애민정신을 생각하며 그 음식을 선농탕이라고 불렀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설렁탕이 됐다. 어떤 사람들은 소를 잡아 설렁 설렁 끓여 설렁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설렁탕은 끓는 물에 뼈와 고기가 오랫동안 우러나야 진한 맛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설렁탕은 임금님의 백성을 굽어 살피신 마음이 베여있어 더욱 진한 향기가 나는 것일 것이다.
어린나이에 남편과 헤어지고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도 벌써 3년이 지났다. 친정엄마도 아이를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였기에 아이를 봐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서부터 어린이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집 원장님께서 전화를 주었다.
“풀잎이 어머님 되시죠? 여기 어린이집인데요. 아이 문제로 상의드릴 일이 좀 있어서요.”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데 나는 급하게 처리하던 일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더 급하니 나중에 다시 전화를 걸어 달라고 말할 뻔했다.
“네? 잠시만요. 아이 문제라니요?”
“풀잎이가. 말을 잘 안하려고 하네요.”
“아이가 원래 말을 잘 안 해요. 집에서도. 몸이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죠?”
“어머님. 이건 몸이 아픈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것 같은데요. 일단 오늘 저 좀 뵙고 가세요.”
어린이집 원장선생님께 한 차례 꾸중 아닌 꾸중을 듣고 난 뒤 7시가 넘은 시각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이는 방 한 편에 곤이 자고 있었다.
“풀잎이 어머님 되시죠? 잠시 제 방으로.”
“네, 오전에는 죄송했어요. 제가 급한 일을 처리할 게 있어서. 원장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못했네요.”
“일이 많이 바쁘신 건 알겠지만. 그리고 제가 의사도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풀잎이가 유난히 또래보다 정서발달이나 언어 발달이 늦은 것 같아요. 지금 풀잎이 정도면 한창 이것저것 호기심도 많고 말도 많이 웅얼거릴 시기인데 혼자 장난감만 쥐었다 폈다 정도니까.”
원장님의 말에 갑자기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에게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지금 아이는 홀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니. 그것도 이렇게 조그마한 아이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선생님.”
“뭐, 일단 아이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엄마 아빠와 고루 정서를 교감하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물론 그러기 힘들다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지만요. 아니면 자연이나 동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차선책이긴 하지만 그런 것도 좋고요.”
아이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원장선생님 말씀에 큰 결심을 해야 했다. 엄마손이 가장 많이 필요한 시기에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한 아이는 정서가 고루 발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번 주 주말에 하루만 시간을 내기로 했다.
오랜만에 우리 세 식구가 모였다. 가족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날씨도 좋았고 북서울꿈의숲에는 역시나 가족단위로 모인 사람들이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넓고 넓은 잔디밭이 어색한지 자꾸만 한곳에 가만히 서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잔디를 밟아보았다.
“풀잎아. 이게 잔디야. 잔디. 그리고 지금 풀잎이 볼을 스치고 간 건 바람.”
풀잎이도 마음이 조금 열렸는지 발을 콩콩 굴렀다. 한 손에는 아빠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엄마의 손을 잡은 풀잎이는 모처럼 신이 난 모양이었다.
“우리 풀잎이 기분 좋아? 풀잎이가 좋으니까 엄마도 기분 좋다.”
“엄마, 아빠, 풀, 바람, 하늘, 구름”
풀잎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들을 나열하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감추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청했다.
남편이 이런 내 모습을 보았는지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남편의 뜻밖의 행동에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또 눈물이 핑 돌았다.
“혼자 힘들었을 거 알아. 양육비랍시고 돈 보내주는 것 밖에 못해서 미안해. 오늘 풀잎이 보니까 나도 느끼는 거 많았어. 미안해. 앞으로 자주 시간 보내자.”
남편의 말에 어쩐지 힘이 났다. 그 누구의 말보다 그 누구보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젯밤부터 내린 비가 그치고 이제 막 밝은 빛이 얼굴을 내미는 봄날입니다. 마당으로 민지가 작은 모종삽을 들고 나왔지요. 민지는 앞니 두 개가 빠진 개구쟁이 여덟 살입니다.
민지네 집은 경주에서도 아주 유명한 집이에요. 바로 민지의 할아버지 아니, 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쭉 경주에서 터를 잡고 대대로 경주에서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민지네 할아버지는 경주의 토박이로 터줏대감 할아버지로 불리고 계시지요.
어쩐 일인지 민지는 아침부터 소란입니다. 마당에서 이리저리 삽을 들고 아빠를 재촉하지요. 오늘은 아빠와 작은 귤나무를 심기로 한 모양입니다. 어디에 심으면 좋을지 고민을 하던 민지는 작은 텃밭 옆에 한 곳을 가리켰지요. 민지와 아빠는 나무를 심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민지의 삽이 흙 속에 쑥 들어가자 덜거덕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무엇인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민지는 조심스럽게 흙을 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자기 같은 물건이 땅속에 박혀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민지는 놀란 마음에 다급히 아빠를 불렀고 아빠는 조심스럽게 물건을 꺼내었습니다. 마당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민지의 할아버지가 마당에 나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나온 청동으로 만든 접시를 살펴보았습니다.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감지하신 할아버지는 나라에 신고하셨고 민지네 집에 문화재 조사를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민지는 어리둥절하여 아빠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어요. 아빠는 민지를 무릎에 앉혀두고 집 마당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민지야. 우리가 발견한 청동 접시 말이야. 저번에 민지도 가봤던 박물관 있지?
그곳에 전시될 거야. 그곳에 우리 집 주소도 적힐 것이고 발견자로 민지 이름도 적힐 거야. 어때? 신기하지?”
유물 그리고 문화재에 큰 관심이 없던 민지는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그날로 아빠를 졸라 경주에 있는 세계문화유산과 문화재를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민지는 사실 경주가 신라 천 년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수학여행도 서울에서 경주로 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지요. 그런 민지가 아빠에게 먼저 경주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을 구경 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지는 먼저 별을 관측하였다는 신라인들의 과학지식이 엿보인 첨성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분황사를 지나 오릉까지 구경하며 스탬프를 찍고 신라 시대의 과학의 집결지인 불국사와 석굴암까지 둘러보았습니다.
그렇게 신라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살아있는 천 년 역사의 고장 경주를 경험하고 온 민지는 그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졌습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역사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탓에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잠든 민지는 꿈에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민지가 빙그레 웃습니다. 꿈에서 신라인이라도 만난 것일까요? 아니면 마당에서 발견한 유물이 박물관에 전시된 상황을 본 것일까요?
그동안 민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경주의 문화재와 역사에 대해 너무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소중한 의미를 알지 못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직접 유물을 발견하고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깊이 느끼고 나니 자신이 경주에 살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뿌듯하게 느껴졌습니다. 잠든 민지가 한 번 더 빙그레 웃습니다.
약간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큰기러기의 보드라운 깃털 사이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이제 가을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강가는 아직 활기차다. 논병아리 가족들이 줄지어 쪼르르 헤엄치고 있고 청둥오리들도 무리지어 강가를 누볐다. 강가에서 유일하게 혼자인 희망이는 강가를 빙빙 돌며 헤엄쳤다.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희망이는 날개를 괜히 접었다 폈다 하며 빨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희망이는 큰기러기이다. 일찍이 가족들과 이별한 희망이는 강가에서 늘 외롭게 떠돌았다. 간혹 친구들을 사귀기 하였지만 그런 친구들은 금세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래서 희망이는 더욱 외로움에 자신을 가두기도 하였다.
별이 쏟아질 듯한 밤이 오자 희망이는 샛노란 달님을 보며 어김없이 가족들을 그리워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찬바람이 제법 쌀쌀해졌고 강가를 누비던 논병아리 가족들과 청둥오리도 서로 몸을 맞대며 추위를 견뎠다. 이제 겨울이 온 것이다. 외로운 희망이는 몸을 맞댈 가족도, 친구들도 없었다. 또 홀로 날개를 펄럭이며 강가를 빙빙 돌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그때 한 무리의 오리 떼들이 날아왔다. 언뜻 봐도 어마어마한 수의 오리 떼들이 날개를 펼치며 강가로 내려왔다. 희망이도 오리 떼들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수는 처음이었다. 큰 눈이 더욱 휘둥그레져 오리 떼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많은 오리의 무리에서 유난히 초록색의 멋진 머리를 가진 오리 한 마리가 희망이에게 다가왔다. 희망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고 초록색의 머리를 가진 오리는 희망이에게 자신은 가창오리라고 소개를 했다. 희망이도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고 가창오리는 잘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늘 홀로 강가를 헤엄치던 희망이는 무리지어 헤엄치는 가창오리가 부러웠다. 일제히 하늘을 검게 수놓는 모습도 부러웠다. 그렇지만 가창오리들은 봄이 지나면 다시 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혼자가 될까 두려운 희망이는 가창오리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또다시 상처를 받을까 봐 가창오리 주위만 맴돌 뿐 가까이 가지 못했다. 그렇게 선뜻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희망이를 위해 가창오리는 갈대를 꺾어 피리도 불어주고 예쁜 꽃을 날개에 달아주기도 하였다. 어느새 마음을 열게 된 희망이는 가창오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멋지게 하늘을 날기도 하고 누가 더 빨리 헤엄칠 수 있는지 내기도 하였다. 붉은 노을이 스르르 하늘을 물들일 때 일제히 하늘을 수놓는 가창오리의 춤사위를 부러워하던 희망이도 파르르 날아올라 그 무리에 슬쩍 껴보기도 하였다. 시간이 흘러 못 보던 텃세들과 나그네새들이 날아와 친구가 되기도 하였다.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던 희망이었지만 가창오리와 함께 지내면서 먼저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아니, 봄의 마지막이 왔다. 이제 가창오리들은 다시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할 때였다. 희망이는 슬퍼졌다. 가창오리의 주변을 빙빙 맴돌 뿐이었다. 가창오리는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희망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 할 때가 왔다. 코끝이 찡해지고 날개가 떨려왔지만 희망이는 입을 꾹 다물며 떨어지려는 눈물을 삼켰다. 어젯밤 달을 보며 가창오리가 떠날 때 울지 않겠다고 가족들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웃으며 가장 멋진 모습으로 떠나보내 주겠노라고 다짐을 한 희망이는 가창오리에게 잎사귀로 만든 멋진 나비넥타이를 선물하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가창오리도 희망이와의 추억을 잊지 않겠다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라는 인사를 했다.
가창오리는 힘차게 날아올랐다. 가창오리가 날아오르자 나머지 오리들도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희망이를 위한 마지막 군무를 보였다. 붉게 물든 하늘위로 검은 가창오리 무리가 높게 날아올랐다가 아래로 내려오더니 희망이의 모습을 하늘에 수놓았다.
“안녕! 희망아, 가을이 되면 다시 돌아올게. 그때까지 건강해야 해!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희망이도 하늘을 보며 있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가창오리 떼들이 먼 길을 떠나고 나서야 희망이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잘 가! 가창오리야! 보고 싶을 거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희망이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가창오리와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창오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희망이의 아름다운 날들은 계속될 것이다.
장거리 연애의 고충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누군가 이들에게 장거리 연애를 하겠다고 하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뜯어말릴 것이라 할 정도다. 가장 큰 고충은 다른 연인들처럼 매일 매일 볼 수 없다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 집 앞에서 밤새 기다릴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 흔한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서로를 만나러 달려갈 수도 없다는 것이 가장 가혹하다면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둘도 처음부터 장거리 연애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동욱과 선아는 사내커플이었다. 입사동기로 들어와 함께 밤새워가며 프로젝트를 맞고 기획안을 작성하며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동욱에게 갑작스런 지방발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대리, 자네도 곧 대리에서 벗어나야지. 언제까지 대리 그 자리에 머물기만 할 건가? 딱 2년만 눈감고 내려갔다와. 올라오면 팀장자리 하나 내 만들어 놓을테니.”
“부장님, 그래도 완도까지는.”
“자네 지금 우리 회사에서 완도에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는지 몰라서 그러나? 일단 내려가 봐. 갔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시 올라오면 되잖나?”
회사에서 내려진 인사발령이니 못 내려가겠다고 어린애처럼 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일단 내려간 완도다. 매일 보던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이었다. 선아는 군대 간 남친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했고 편지와 문자,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데이트를 해야 했다.
그날따라 눈꺼풀이 무겁고 축 가라앉는 날이었다. 그 전날 동욱과 통화하면서 몸살이 난 것 인지 상사병이 난 것인지 모르겠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었다. 어차피 동욱은 바로 올라올 수 없었고 괜히 걱정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선아도 그저 농담 식으로 이야기 하며 지나갔었다.
하는 수 없이 병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택배요”
주문한 것이 없는 데라고 생각하며 가까스로 문을 택배를 받아보니 보낸 사람의 주소가 완도였다. 발신인 이름을 보니 동욱이었다. 놀란 마음과 흥분된 마음으로 택배를 열어보니 완도산 전복과 자그마한 손 편지가 들어있었다. 아마 어제 몸살이 난 것 같다고 잠깐 투정을 부린 것을 잊지 않고 전복죽이라도 끓여먹으라고 보낸 것이 분명했다.
‘많이 아픈 건 아니지? 바로 달려가서 약이라도 사다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서 싱싱한 전복 한 상자 보내니까 죽 끓여먹어. 얼른 기운 차리고. 여긴 공기가 참 좋아. 경치도 좋고. 너와 함께 내려왔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리고 다음 주 주말에 여기 내려올 수 있어? 너랑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아참, 죽 끓여먹은 거 인증샷 찍어서 바로 보내! 전화할게. 사랑해!’
동욱의 귀여운 이벤트였다. 싱싱해 보이는 전복을 바라보니 먹지 않아도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따뜻하게 전복죽을 끓여 수저로 먹는 시늉을 하며 동욱에게 인증샷을 찍어 보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완도에서 보자고 하트까지 뿅뿅 찍어 보냈다.
동욱말대로 완도는 공기가 좋고 경치가 참 좋았다. 선아가 좋아하는 싱싱한 해산물들이 가득했고 특유의 바다 냄새도 좋았다. 둘은 그동안 못 다한 데이트를 실컷 즐겼다.
저녁이 되어서야 선아는 그때 가보고 싶다던 곳이 어디냐고 물었고 동욱은 선아의 손을 잡고 불빛이 찬란한 곳으로 갔다.
불빛을 따라 간 곳은 다름 아닌 완도타워였다.
“완도에도 이런 곳이 있었어? 남산 부럽지 않네.”
“그렇지? 여기 야경이 끝내줘. 봐봐.”
“그러네. 완도 시내가 다 보여. 불빛들 찬란한 것 봐. 멋지다.”
“나 여기서 얼른 자리 잡으면 이렇게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우리 함께 살자.”
선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움이 쌓이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