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복숭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퍽 힘든 일이었다. 도로변에는 복숭아밭이 있고, 봄이면 도화잎이 날렸으며, 여름이면 복숭아 축제가 열렸다. 그리고 우리는 폐교 운동장을 빌어 열리는 그 축제에서 맛볼 수 있는 복숭아 막걸리를 사다가 자취방에 쟁여두곤 했다. 복가난한 대학생들이었던 우리에게는 딱 그 만큼이 행복이었다. 복숭아향이나 복숭아 빛깔, 복숭아 맛까지.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복숭아에 빗대어 표현했으며, 특히 나는 복숭아를 닮은 너의 발그레한 두 뺨을 좋아했었다.
휘어진 가지 끝은 종종 울타리를 넘어왔다. 한밤중이면 우리는 술기운을 빌어, 그리고 세상 모든 대학생의 권리라는 패기를 빌어 복숭아 서리를 감행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가 서리한 복숭아들은 항상 시거나 떫었다. 내가 복숭아를 훔치는 이유는 혹시나 주인이 나타날까봐 잘 익은 복숭아처럼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네가 재미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너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 말이 맞지? 울타리를 넘어 오게 놔둔 것들은 맛없는 복숭아라니까.”
“아무렴 어때.”
나는 정말로,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었지만 너는 금방 토라진 얼굴로 길가에 주저앉으며 맛없는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다. 다리를 까딱이며 맛없고, 조그맣고, 게다가 못생기기까지 한 복숭아를 오래오래, 아주 조금씩 먹어치웠다. 나는 그동안 모난 성격에, 키가 작고, 결코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네 옆모습을 조금씩 훔쳐보고 있었다. 딱 이 부분에서부터 나는 조금씩 혼란스러워진다. 너는 긴 머리를 하고 있던가, 안경을 쓰고 있었던가. 너는 나보다 어렸던가, 아니면 동갑내기였던가. 마침내 네가 복숭아씨를 퉤, 하고 뱉어냈을 때,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던 너의 복사뼈 언저리가 마치 곧 싹이 돋을 것처럼 신비롭게 보였던 것만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어느 날 너는 갑작스레 사라져버렸다. 사고가 났다고 했던가, 아니면 병에 걸렸다고 했던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휴학을 했다고 하던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거짓말처럼 덜 신경질적이며, 키가 더 크고, 더 예쁘장한 아이와 함께 아주 가끔씩 복숭아를 훔쳐 먹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졸업을 맞이한 나는 자연스레 그곳을 떠났다. 몇 년 동안 머무르던 자취방을 정리하고, 기념처럼 가지고 있던 빈 막걸리 병들을 내다 버렸으며, 백 리터짜리 쓰레기봉투 가득 담겨있던 것 중에는 분명 너와의 추억이 서린 물건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렴 어때. 짐정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복숭아, 조치원 복숭아요!”
귀갓길에 트럭으로 복숭아를 내다 파는 노점 상인의 고함소리를 듣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무려 2만원 어치의 복숭아를 사 들고 돌아왔으며, 복숭아를 다 먹어치운 주말 즈음에는 조치원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타고 있었다. 복숭아가 생각보다 맛있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복숭아씨들을 곧바로 내다버리지 않고 싱크대 한 구석에 모아두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나는 그동안 두 번의 연애를 더 했고, 한 번의 이혼을 감행했으며, 첫 번째 이직을 앞두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지쳐 있었고, 다시 말하자면 네가 보고 싶었다. 물론 대학교 캠퍼스에 간다 한들 그곳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저녁 즈음에야 학교 정문 앞에 하차했고, 절반 정도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후배들을 불러내어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고, 급기야는 몇 년 새 더 견고해진 울타리의 귀퉁이를 부수고 복숭아밭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학창시절에 단 한 번도 검거되지 않았던 복숭아서리범이 지금 밭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유다.
‘알 만한 사람이 도대체 왜!’하는 성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쩌면 그곳에서 자라는 복숭아나무들 중, 너의 복사뼈에서 자란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알 만한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도 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나는 가끔 사람들의 발목 언저리를 내려다보곤 한다. 혹시나 낡은 슬리퍼 위로 드러났던 너의 바싹 마른 복사뼈, 금방이라도 싹이 돋아오를 것 같은 어리고 단단한, 못생긴 복사뼈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항상, 굽 높은 하이힐 위로 자리한 동그란 뼈들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모두 매끈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운 모양이다. 나는 가끔씩 그것이 서럽다.
자, 따라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죄송합니다. 아픕니다.
다시 한 번 따라하세요. 자, 저기 알리씨. 입을 더 크게 벌려야 소리도 크게 나지요.
외국인 근로자들은 점심시간 전 10분 동안 기초 한국어 회화를 배운다. 배운다기보다는 반복적으로 따라 읽는 것이다. 한국말이 서툰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알찬 시간이 된다.
“장미씨는 한국말 잘 하니까 이런 수업이 필요 없죠? 그래서 우리 조선족 사람들이 참 좋아. 말도 잘 통하고 일도 야무지게 잘 하고. 자자 손님들 몰릴 시간입니다. 서두르세요.”
경영지원이라는 팀의 차장은 슬쩍 장미의 어깨를 톡톡 치며 능글스런 얼굴을 하고 지나쳤다.
공장이나 공단에서 그렇듯 서울 주변 식당에서도 이주노동자들의 고용률은 대폭 상승했다. 국적도 언어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중에서도 연변사람 즉 조선족들의 고용률이 눈에 띄게 많았다. 아마 외국인근로자라는 이유로 임금 부담이 낮은데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장점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코리안 드림’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버텨가고 있다. 임금을 받으면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모두 고향으로 보내고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아파도 아프지 말아야 했다.
저기요, 여기 이거 고기 정량 맞아요? 저기요, 여기 반찬 좀 더 달라는데 왜 안 갖다 줘요? TV프로그램 채널 좀 돌리게 리모컨 좀 가져다 줘요.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말투와 억양이 좀 어색한 외국인 근로자들을 보면 유난히 뾰족한 말투로 그들을 대했다. 여기 사장 나오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반말로 야, 너라고 말하는 사람, 심지어는 욕설까지 아무렇지도 내뱉는 사람들까지.
사실 그들을 홀대하는 것은 식당을 찾은 손님들만은 아니었다. 식당에서도 일종 텃새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좀 더 험한 일을 한다거나 사고가 났을 때 처리들이 그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주방에서 일을 하다 화상을 입었다거나 배달을 나갔다가 오토바이 사고라도 나면 병원비를 지급해주기는커녕 오토바이 수리비를 임금에서 차감하는 일도 잦았다.
그들의 코리안 드림은 녹록치 않았다.
꺅. 짧은 외마디 비명이 주방 창고 쪽에서 들렸다. 식당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창고 쪽으로 향했고 몇몇 사람들이 창고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창고에서 식당 최고참 주방장이 허겁지겁 나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주방장은 별일 아니고 선반에서 물건이 장미씨 머리 쪽으로 떨어질 뻔 했다고 했다. 그런데 창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래쪽 선반에는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고 장미씨가 겉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장미씨, 이리와 봐요. 아까는 많이 놀랐죠?”
식당에서도 유일하게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친절한 여직원이 장미를 불렀다.
“아, 네. 조금요.”
“나도 한국 사람이지만 식당일 하면서 사람들한테 정떨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야. 그러니 외국인들은 오죽할까 싶어. 나라도 나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해주고 싶지만, 괜히 불똥 튈까 무서워서 그러지도 못하고. 씁쓸하네.”
“아니에요.”
“혹시나 사장이든 주방장이든 또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참지 말고 말해요. 왜 당하고 있어야 해. 사실 그렇잖아. 나나 그쪽이나 여기 사장이나 다 돈 벌자고 하는 거잖아. 가족들 부양해야 하고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봐주고 외국인이라고 무조건 참고 그건 옛날 일이야. 요즘은 그런 시스템도 다 잘 돼 있다고 하더라고. 주방장일은 내가 잘 말해볼게. 놀랐을 텐데 오늘 마감은 내가 하고 들어갈 테니 얼른 집에 가봐요.”
장미는 눈물이 찔끔 났다. 서럽고 서러운 마음이 겹겹이 복받쳐 뜨거운 눈물로 흘려 내렸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말처럼 쉽지 않음을 알기에 장미는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강해져야 했다. 기회의 땅에서 외로움을 딛고 당당히 일어나 꿈을 이루어야 하기에.
어느 날, 후배 한 명이 미리 주는 생일 선물이라며 김광석의 베스트 앨범 한 장을 건네 왔다. <서른 즈음에>라는 곡명에 형광펜으로 체크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나를 곯리려 작정을 한 것이 분명했다. 괘씸하기는 했지만, 명곡은 명곡이었다. 신세대라고 하기에는 구세대이고, 구세대라고 하기에는 신세대인 어정쩡한 나이가 된 나는 이수영이나 성시경의 노래보다는 김광석의 노래를 더 사랑했다.
헤어진 전 여자 친구이기도 한 후배는 ‘술 좀 줄이시고요.’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또 마침 소주 안주로 제일인 것이 김광석의 노래라 하지 않았는가.
결국 과음을 한 탓에 다음 날 수업에 나가지 않자, 후배가 뺨을 붉히며 숙취 해소 음료 하나를 건네 왔다. 후배의 복잡한 표정에서, 그 애가 못다 한 말들이 읽혔다. ‘선배님, 장난 치고는 좀 심했죠.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하실 걸 모르는 게 아닌데. 기분 전환이나 하시라고 드린 선물이었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하고 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말 대신, 뜬금없이 대구에 있다는 김광석 길에 함께 가주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술이 덜 깨서일까, 아니면 김광석의 달콤하고도 쌉쌀한 노래들을 어제 하루 종일 들어서였을까. 아차 하는 마음에 미안하다고 말하려 하는데, 후배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가 다음 수업이 있다며 인사를 하고 강의실을 나간 뒤에도, 나는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후회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술은, 정말로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헤어진 후로 몇 달이나,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물로 받은 것이 김광석의 앨범이요, 몇 달 만에 들어보는 따뜻한 말이 술을 좀 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광석의 노래가 내 방을 가득 채우니 술이 고픈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거쳐 타이틀곡인 <변해가네>까지는 그럭저럭 견뎠지만,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냉장고를 열고 소주병을 꺼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 농담처럼, 내게도 서른이 왔다. 철부지 새내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몇 번의 작은 성공과 몇 번의 연애, 그리고 몇 번의 쓰린 실패 끝에 내게도 서른이 오고야 만 것이다. 잦은 휴학에, 아직 대학 졸업장도 받지 못했는데 말이다.
안주 없이 소주잔을 비우며 몇 방울의 눈물을 떨궜던 것 같기도 하다. 서른이라는 막막한 숫자 앞에, 그리고 서른이 되도록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거울 앞의 내 모습에 말이다. 내 인생의 역할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며, 내 안의 어떤 것이 같이 죽어버렸다. 울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아버지의 시신을 보았을 때, 영영 무너지지 않을 아버지의 철옹성 같던 어깨가 실은 작은 새처럼 여린 것이었음을 알게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가장 크게 믿던 사람이 그렇게 한 순간에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현석아, 네가 이제 우리 집의 기둥이여.”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이 싫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머니와 여동생의 버팀목 역할을 맡아야 했고, 그 자리가 두려워 계속 뒷걸음질만을 치다가 끝내 주저 앉아버리고야 말았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다가온 주말에 나는 정말로 후배와, 아니 내 전 여자 친구와 함께 대구행 기차를 탔다. 여전히 조금은 어색한 사이였기에 애초에 많은 대화가 오가지도 않았고,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아 간간히 오가던 대화마저 완전히 끊겨 버렸다. 서로 감정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연애는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 나른한 봄의 정적 속에서, 나는 잊고 있었던 풍경 하나를 기억해 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의 서른 즈음에 있었던 일을 말이다. 만취하여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김광석의 노래를 열창하셨다. 다른 어떤 노래도 아닌, <서른 즈음에>를. 그것도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라는 부분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부르셨다. 비어가던 서른 살 아버지의 가슴을 다시 차오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툭, 하고 내 어깨 위로 고개 하나가 기울었다. 그 애가 봄기운에 취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서른 즈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졌던 월미도는 연인들의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노르망디상륙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이라고 불리는 인천상륙작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 나는 자연스레 다시 이곳을 찾았다.
어머니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셨던 아버지를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발생한 여덟 명의 전사자 중 한 분은 아니셨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으셨지만, 전쟁에 대한 후유증으로 힘들어 하시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전쟁이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전쟁을 회상하시면서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으셨다.
“네가 그 자랑스러운 분의 딸이란다.”
어릴 때부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의 어머니는 항상 환하게 웃고 계셨다.
문득 십 년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에는 너무 무거운 분위기의 기념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큰애인 미현이도, 작은 애인 미정이도 여기저기에 자리한 총을 든 군인들과 탱크들의 모습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울먹이며 보채는 어린 딸들 때문에 기념관을 자세히 둘러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아이들도 대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 그런지 사뭇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런 딸들을 보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라면, 참전자의 가족들은 이곳에 와서 울음을 터뜨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아이들도 전쟁을 피부로 겪어 본 세대는 아니었다. 나조차도 이곳에 있는 전쟁의 기록들이 어렵기만 한데, 딸들에게는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유월 이십오 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단체로 관람을 온 아이들이 많았다. 원복을 입고 노란 가방을 멘 유치원생들은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물이 글썽해진 아이도 있고, 친구의 손을 꼭 잡은 아이도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상하기만 한 일인 것 같았다.
“선생님! 전쟁이 또 일어나면 어떻게 해요?”
흑백으로 찍힌 전쟁 사진들을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질문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스쳐 지났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나조차도 전쟁은 먼 나라의 이야기 같게만 느껴지는데 말이다.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 이야기를 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교과서를 통해, 방송을 통해 전쟁 이야기를 접할 때에도 눈물이 나기는커녕 ‘아, 저런 일이 있었구나. 잊지 말아야지.’하는 단편적인 감상밖에는 들지 않았다. 유월이 될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쓰는 말인 ‘호국영령’ 중 한 명이 바로 우리 아버지인데도 말이다. 몇 십 년이 지난 뒤에 내가 죽어 아버지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 아픔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해야 할 텐데 그것이 너무 어려웠다.
야외 전시장을 지나 기념관을 나서려는데 미정이가 나를 불렀다. 딸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벽을 오르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한 청동상이 있었다.
“엄마, 이것 좀 봐요. 이 중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있을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어찌 할 수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 어머니의 얼굴 대신, 부엌에서 숨을 죽여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아픔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지겹도록 건조한 일상의 반복이 시작된 것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꽤나 오랫동안 나는 이 생활을 지속해 왔고 지금은 그 생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마치 오랜 기간을 만난 연인 사이에는 더 이상의 설렘과 풋풋함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런거였을까. 오래 만난 연인에게 늘 찾아온다는 권태기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건조하고 팍팍한 일상에서 한 번 벗어나 보고 싶다, 뭔가 말랑말랑하고 몽글몽글한 새로움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또 일상에 문득 찾아온 권태기가 점점 사그라들 때쯤, ‘딩동’하는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가끔씩 눈요기용으로만 사용하는 SNS 친구신청 알림메시지였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내 인간관계에 새로울 사람이라고는 없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친구 신청한 그의 이름을 보니 어렴풋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세 글자, ‘조수호’.
그였다.
작년 여름, 한 9개월 전쯤이었지 아마. 회사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원하는 날짜에 휴가를 받지 못하고 남들 다 여름을 즐기고 난 후에나 느지막이 3일 휴가를 받았었다. 그래도 나름 휴가인데 하는 마음에 아무 계획 없이 덜컥 기차표부터 끊어 놓았다. 목적지는 파주, 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최고의 결정이자,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의 파주로의 반짝 휴가는 시작되었다. 여행은 늘 언제나 그렇듯 향하는 곳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적어도 나에게 파주는 그런 도시였다. 잘 알지 못하는 곳에 대한 두려움과 그래서 더 많이 보고 느끼고 싶다는 벅찬 욕심을 안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여행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단 생각에 준비한 라즈베리필드의 ‘청춘열차’라는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혼자라도 왠지 기분이 좋은 여행길 / 설렘 가득 안고 달려가고 있어 / 낡은 철길 위로 맑은 하늘 바라보네 / 내 마음은 바람소리에 맞춰 춤을 춰
노랫가사가 내 마음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행복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파주의 모습은 파랬다. 파아란 하늘과 초록나무로 가득 찬 이곳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제일 먼저 발걸음이 향한 곳은 말로만 듣던,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도 아기자기하고 예뻤던, 파주출판단지였다. 좋아하는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엄마, 돈, 책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책은 그런 존재다 내게, 그래서 더 ‘파주’라는 곳이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어떤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행운이었다.
‘행운’, 아마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조수호’. 그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출판단지 안에 있던 지혜의 숲이었던가. 온통 책으로 뒤덮인 그 곳에서 나와 그는 처음 만났고, 서로 통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의 미묘하지만 애써 담담하게 건넨 첫마디는 ‘저.. 책 좀 추천 부탁드려도 될까요?’였다. 그리고는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는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다음날 임진각까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알고 보니 그는 파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그럼에도 일부러 그러는 건지, 진짜 어리숙한 사람이여서 그랬는지 임진각을 가는 데에도 꽤나 애를 먹었다. 그래도 참으로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과 만나 함께 서로의 마음과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은 꽤나 신선하고 즐거운 일이였다. 그렇게 3일이라는 시간을 그와 파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어색함이 감돌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두근거리고 떨렸던 나의 여행. 그는 더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이제는 현실의 나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기차역까지 바래다주면서 그는 말했다. ‘은하씨, 우리 또 만나요. 또 만나고 싶어요.’라며, 그렇게 나는 떠나고, 그는 남았다. 그리고 그 뒤로 간간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연락을 주고받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점점 연락을 하는 횟수가 뜸해졌고, 절대로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이야깃거리도 다 써버린 듯 형식적인 인사들만 주고받다가...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렸다.
그런데 지금 딱, 내가 일상에서의 나른함과 권태로움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기라도 한 듯 먼저 손길을 내민 그에게 나는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 그냥 친구신청이라기엔 너무나도 오랜만이고,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곧, 떠올랐다. 그를 위한, 아니 그와 나를 위한 명쾌한 대답을.
떠나기로 했다. 다시.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있는 그 곳, 파주로.
갑자기 지난 여름의 기억들이 하나 둘 내 가슴 속에 와 닿으며 또 다시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그래서 예전의 설렘과 풋풋함, 새로움이 가득한 나 자신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번에도 파주행 기차표를 덜컥 끊어버렸다.
해운대에 내려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날이 갈수록 날짜 세는 데에 무심해지고 있으니, 오늘 날짜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일이 다반사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부정적인 일이 아니다. 내가 쓰는 시간을, 내게 남겨진 시간을 세는 것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꽤 인지도가 있다. 추억을 남기려 내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는 꼭 배경으로 노을 진 바다를 함께 그려준다. 그것도 붉은 빛이 아니라 노란 빛깔로 노을 져 가는 바다를 말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단순한 서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여기에는 나만 알고 있는 사연이 있다.
무작정 그림을 그리겠다고 해운대로 내려왔다. 집안의 반대가 심하여, 어렵게 들어간 미술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하고 경영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꼭 안아주셨다.
“넌 어디 가서든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를 더 붙잡지 못하고 이 말만을 전하실 때의 그 심정이 어떠했는지, 나는 아직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꼭 성공하겠다는 막연한 한 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집을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부산 쪽에 살고 있는 친구가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캐리커처를 그려 주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고작 몇 시간 뒤에 해운대에 닿을 수 있었으나, 해변에서 캐리커처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내게 쉬이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무턱대고 사람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아쿠아리움 앞에 앉아 자리를 폈다가 싸움이 붙을 뻔한 적도 있었다.
어느 흐린 날, 백사장 끝까지 밀려난 나는 그 날의 장사를 포기하고 해변을 따라 걸었다. 집을 떠나면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제일 먼저 그리워진다더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 분명 비어있는 내 방에 들어가 내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시고 계실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꽤 멀리까지 와 버렸다. 친구들과 몇 번 놀러 온 적이 있어 해운대 번화가의 지리는 꽤 잘 아는 편이었지만, 해수욕장을 벗어난 적은 없었다. 작은 목조계단이 보이고, 어느 새 동백섬 입구를 마주하게 된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동백섬으로 들어갔다.
앞길이 깜깜할 때 바다를 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망망대해 앞에 서 있으면 내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절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순수 미술을 전공하겠다는 사람이 이만 원을 받고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기분만 우울해지는 것을 괜히 올라왔다고 생각하며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 때, 내 앞에 인어공주가 나타났다.
바위 위에 올라앉은 그녀는 아름답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대신,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손에는 구슬이 하나 들려 있고, 옷자락 아래로는 물고기의 꼬리가 숨겨져 있다. 무슨 연유인가 하니, 이 공주의 외할머니의 나라는 바다 아래의 수정국이며, 어머니의 나라는 바다 건너 나란다국이라 하였다. 공주가 이 동백섬에 시집을 와서 왕비로 살다가 두 나라를 몹시 그리워 하니, 그녀가 가진 황옥에 달 밝은 밤이면 두 나라가 비쳤다고 한다.
나는 청동상으로 만들어진 이 인어공주의 모습에서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때마침 해가 저물기 시작했는데, 흐린 날의 일몰은 새빨간 홍옥이 아닌 노오란 황옥 빛깔이었고, 그 공주의 이름도 모국의 이름을 따서 황옥이라 하였다. 황옥 공주의 쓸쓸한 등 위로 노랗게 타는 노을빛이 내리니, 나는 그때야 이 바다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운대 앞바다가 아닌, 고향을 그리워하는 황옥 공주가 앉아 있는 동백섬 앞바다를 말이다.
집을 떠난 지 한 달. 나는 그날에서야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물이 핑 돌았지만, 쉽게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가로서 당당하게 내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나는 그림마다 노랗게 타는 노을을 그려 넣었다.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펴자 다른 그림쟁이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하루하루, 느리지만 차근차근 내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렀다.
인적이 드물어지는 시간이면, 가끔 황옥 공주 옆에 가 앉아 함께 황옥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황옥에는 가끔 우리 집이 비치곤 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이제는 내가 되려 위로를 건넨다. 돌아갈 곳이, 그리워 할 곳이 있기에 바다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오랜만이네, 새댁!
반가운 말투로 인사를 하는 아주머니 말투에 아무런 반박도 없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실제로 오랜만에 들른 것도 아니었고 새댁 꼬리표를 달만큼 풋풋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시장으로 직접 올 때에는 시어머니의 부름을 받을 때이다. 결혼 준비 즈음 친구들은 시댁과의 거리는 최대한 먼 곳이 좋다고 했다. 없으면 더 좋고. 남자들이 생각하면 식겁할 이야기이지만 오죽하면 ‘시월드’라는 말이 나올까 한다. 거기에 시누이는 덤이다.
우리 어머님은 마산어시장에서 전어를 파신다. 우스갯소리로 너는 전어 때문에 절대로 집 나갈 일은 없겠다고 했지만 왜 없을까. 고부관계에서 기권을 들어버린 남편과 시누이가 무슨 벼슬인 줄 아는 시누이까지. 그렇다고 시어머니가 무작정 싫은 것은 아니었다.
새아가를 시장으로 불렀다. 며늘애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지만 전화기 너머로 또 시장으로 부른다며 투덜거리는 음성이 귓가에 맴맴 돈다. 친구들이 왜 며느리 눈칫밥 먹으며 사냐고 당당히 살라고 하지만 요새 어디 그런가 싶다. 비린내 나는 손으로 손주 새끼들 얼굴도 못 만지게 하는 며느리 때문에 손주들을 미술관 전시품마냥 ‘좋아라’ 보기만 해야 할 때도 있다. 며느리와의 사이가 소원해진 건 시장을 맡아서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부터였다.
요즘 누가 시장에서 장사하는 걸 환영하겠느냐마는 그렇게 남처럼 퉁명스럽게 피할 줄은 몰랐다. 하기야 요새는 집 비밀번호 물어보면 왜 빈집에 들어가려고 하는지 그냥 자기네들 있을 때 오라고 하라고들 한다더라.
“어머니, 저 왔어요. 그동안 별 일 없으셨죠?”
그동안 이라는 단어에서 어색함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남의 집에 오는 사람처럼 꼭 무엇을 들고 온다.
“뭘 이런걸 사와. 그냥 오지.”
“그래도요.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시장. 그만 두기로 했다고. 그 말 하려고 불렀다. 비린내도 지겹고 힘에 부치기도 하고. 그리고 너한테 이어받으라는 그런 말도 안하마. 그냥 팔기로 했어.”
“어머니.”
“아무 말 마라. 그렇게 하기로 했어. 아범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고. 삼 대째 이어왔으면 그걸로 됐지. 언제까지 이어하겠니.”
시어머니의 눈에는 살짝 눈물이 맺혔으나 그것은 원망도 미움도 아닌 굳은 결심으로 인한 후련함 때문이었다. 진작 이렇게 결정했다면 며느리와도 소원해지지 않았을 테고 마음도 한결 편안했을 것이다.
“어머니, 죄송해요. 그래도요 어머니, 시장 오기 싫다고 하면서도, 비린내 맡기도 싫다고 하면서도요 어머니, 우리 환이 가졌을 때요. 어머님이 구워주셨던 전어가 그렇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 한마디를 못하고…. 그런데 어머님 어떻게 알고 전어 보내주셨잖아요. 그때 저 솔직히 눈물 나더라고요.”
“왜 안 섭섭했겠니. 나도 처음에 우리 시어머니가 시장 도맡아 하라고 할 땐 벼락이라도 맞은 듯했는데. 그래도 이 전어 때문에 집 안 나가고 여기에 뿌리내리고 있던 거 아니겠냐.”
오랜만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 만인가 싶다. 시장의 비릿한 생선냄새 대신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적당히 기름기가 낀 전어의 고소한 냄새가 난다.
절에만 간다 하면 심통을 부리는 아들 녀석이 유달리 좋아하는 절이 있다. 바로 부산에 있는 해동용궁사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맞는 첫 여름방학을 기념하여 온 가족이 함께 바다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들렀던 곳이 바로 해동용궁사다.
나라고 해서 불심이 깊어 절에 가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불자이셨지만, 나는 전형적인 무교다. 내가 절을 좋아하는 것은, 교회와는 또 다른 빛깔의 화려한 색채들과 그윽한 향내의 조화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용! 용 있는 절! 용 사는 절!”
“어휴, 진형아. 조용히 좀 하자. 지금 가고 있잖아.”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차 안에서 소리를 질러 대는 진형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남편이 옆에서 ‘이제는 진형이가 당신보다 더 절을 좋아하게 되었다’며 웃었다. 사실 나는 오랜만에 비키니도 입어보고 싶고, 바다 절벽 위에 자리한 펜션에서 여유를 즐기고 싶은데 주객이 전도 되어 버린 기분이다.
남편이 취향이 워낙에 유치한지라 진형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함께 <드래곤볼>을 보았는데, 진형이는 여기 나오는 용신을 제일 좋아했다. 어린 아이가 보기에는 폭력적인 면이 없지 않은 만화영화라 걱정했었는데, 주인공이 지구를 구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커다란 용신이 멋있단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용 모형만 보면 사 달라고 떼를 쓰곤 했는데, 그런 진형이를 해동용궁사로 유인하기 위해 ‘그 절에 사실 용이 살고 있다’고 말한 것이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결국 다른 일정을 모두 제쳐 두고 용궁사를 제일 먼저 찾았다. 일부러 평일을 골라 왔는데도 주차장에 차들이 넘쳐나는 것이, 혹시 다른 엄마들도 다 나와 같은 거짓말을 해서 아이들을 데려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엄마, 빨리 좀 와! 엄마는 느림보야! 무천도사 같아!”
그게 누군지 묻기도 전에 진형이가 저만치 달려 나간다. 노점상에서 파는 씨앗 호떡 하나를 들려주어 겨우 진형이를 진정시키고 용궁사 가는 길을 올랐다. 같이 좀 말려 주면 좋을 텐데, 남편은 용을 외치며 방방 뛰고 있는 진형이가 그저 귀여운 모양이었다. 용궁사 가는 길에 있는 십이지상 앞에서 원숭이띠를 찾아 사진을 찍어 주니 또 좋아 죽겠단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주인공도 원숭이라던데, 자기가 만화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보다.
두 번째로 오는 길인데도 이렇게 난리 법석인데, 초행길은 오죽했겠는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경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용을 찾고 있던 진형이가 없어져 울상이 돼 있는데, 대웅보전 앞에 서 있는 진형이가 보였다.
무엇을 보고 있나 했더니, 대웅보전 앞에서 꿈틀대고 있는 커다란 비룡상과 비룡이 쥐고 있는 여의주였다. 용이 좋다, 좋다 노래를 부르더니만 막상 눈앞에 있는 용을 보니 무서웠던지 뒷걸음질을 치던 진형이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진형이한테 가기도 전에 지나가던 어르신 한 분이 얼른 진형이를 일으켜 세웠는데, 진형이는 감사하다는 인사 대신 ‘드래곤볼!’하고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드래곤볼이라니! 얼굴이 새빨개진 나를 제외하고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는 남편까지도 저만치 서서 큰 소리로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그 당혹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백팔계단 초입에 선 득남상의 코와 배에 사람들의 손때가 잔뜩 묻은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궁사에 들러, 나도 옥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내려 주십사 하고 득남상의 배를 쓰다듬어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낳은 아이가 용궁사에서 용을 찾겠다고 신이 나 있으니, 정말이지 인간사란 알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이랑 진형이가 앞서 나가서 빨리 오라고 마구 손짓을 해 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형이가 조금 더 자라 용신을 믿지 않게 되면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물어오지는 않을까 불안해졌다. 아무렴 어떠랴. 지금 이렇게 즐거우니. 용궁사에서 날아올랐다는 용님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