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강남’이라는 행정자치구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강남을 외쳤고 그 외침 하나로 강남이라는 지역 일대에 파란이 일었다. 땅값은 물론 그곳에서 피어난 문화, 패션, 거리 하나까지 그 시대의 트렌드를 이끄는 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강남스타일이라는 대중가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도대체 ‘강남스타일’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을 하는 것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언젠가 강남이라는 단어는 부의 상징이었고 무너져가는 아파트라도 강남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훈장처럼 달리는 명예였다. 소위 잘산다는 사람들의 동네로 불리는 강남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워너비 동네로 자리 잡고 있다.
“너 장래 희망에다 뭐 썼어?”
“난 청담동 며느리.”
“청담동 며느리가 되는 것이 꿈이야?”
“그럼,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남편 잘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니?”
민지는 청담동 며느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민지 말대로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만 그것이 곧 행복이고 꿈이라는 건 조금은 슬픈 일이었다.
드라마에서 재벌집들이 전화를 받으면 동네 이름을 말하며 전화를 받는 것처럼. 민지도 콧소리를 흘리며 ‘청담동입니다’라고 할 것이다.
민지는 항상 만날 약속장소를 말하면 강남역 7번 출구였다. 그래서 친구들은 민지를 강남역 7번 출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요일이면 강남역은 젊은이들의 문화로 가득했고 만남과 만남으로 들떠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붕붕 울리는 음악과 현란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늦은 시각임을 실감하지 못하게 했다. 민지의 헬스클럽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강남역 7번 출구로 나갔다.
민지는 운동으로 잘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도 다 청담동 며느리가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고 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커피숍에 들어가도 민지는 아메리카노 이외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나는 약간 비꼬는 목소리로 그것도 강남 스타일이냐? 라며 비웃었지만 민지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도도한 목소리로 그렇게 달달한 거 자꾸 먹으면 ‘살쪄’라며 생크림 잔뜩 들어간 달달한 내 음료를 비난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강남과 강북을 갈랐고 조망권과 교통권, 문화생활의 차이를 만들어갔고 그 차이를 통해 만족을 느끼려했다.
어쩌면 강남은 서울의 수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많은 스펙을 쌓으며 어떤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까. 과연 서울에도 수도가 있다면 그곳은 강남일까.
여전히 강남역엔 사람들이 붐볐다.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에는 비슷한 차림새에 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과 다른 사연들을 품고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나는 물끄러미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돈이 많은 건 아닐 텐데.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삶과 생각은 다를 텐데 말이다.
민지와 꽤 늦은 시간에 헤어졌다. 민지는 저들 틈으로 사라져갔다. 유유히. 민지는 금세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누가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갔다.
순간 나는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내가 가야할 곳을 말해줄 것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에게 ‘이쪽으로 가면 강남역이 나오고 저쪽으로 가면 청담으로 가는 길일 거예요. 저쪽은 삼성동이고요.’정도로 이야기 해주겠지.
겨우 길을 걸으면서 나는 민지를 떠올렸다. 우리는 민지를 선뜻 속물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람들의 통념이 그렇듯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웬만하면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의 장래희망이 혹은 꿈이 ‘도곡동 고급아파트, 삼성동 유명백화점, 청담동 며느리’가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었다.
돌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승우.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표정이 복잡 미묘하다. 이곳은 돌탑을 구경 온 사람들과 돌탑에 빌기 위해 오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뉜 듯했다. 조용히 돌탑을 바라보는 승우 옆으로 단체 관광객들이 이 돌탑에 대해 아는 지식이 많은 양 가타부타 떠들어 댔고 그 말 중에서는 거센 태풍이 휩쓸고 갔어도 이 돌탑만큼은 쓰러지지 않았다고 한다며 놀라워했다. 돌탑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저 높이 올라간 돌만큼이나 굳건했다. 기이한 현상일까. 그도 그럴 것이 돌탑 바로 옆에는 지난 태풍으로 인해 쓰러진 나뭇가지가 그 현상의 미스터리함을 더했다. 승우는 돌연 생각에 잠겼다.
평소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살아온 승우였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떠들어대는 귀신 이야기조차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눈 하나 깜박 않고 넘겨오던 그였다. 그럴 때면 친구들은 재미없는 녀석이라고 웬만한 과학자들도 너보다는 덜 이성적일 것이라며 치를 떨기도 했다.
아마 그의 어머니가 지극히 미신을 믿어서일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점쟁이를 찾았고 운세를 보러 다녔다. 그렇게 극성을 떨던 어머니가 차마 집안에 굿판을 벌일 수 없었던 것이 승우 때문이리라.
아들인 승우가 수능을 칠 때에도 사법고시 시험을 칠 때에도 어머니는 극성을 떨었다. 마음 깊이 기도를 드렸고 지금 승우가 서 있는 이곳, 마이산 돌탑을 찾았다.
돌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성적인 아들의 명석한 두뇌 때문이었을까 승우는 원하는 학교에 붙었고 사법고시도 한 번에 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쓰러지셨다.
‘그렇게 찾아다닌 점쟁이는 엄마가 쓰러지실 것을 알았을까. 알았으면 귀띔이라도 해줄 것이지. 그럼 그렇지. 그런 미신들 다 소용없으니까 그렇게 누누이 믿지 말라고 말했건만.
그렇게 돈 갖다 바치고 시간 갖다 바치면 뭐해 정작 엄마는 이렇게 쓰러져 있는데.
내 말 들리지 엄마? 엄마 이젠 눈 좀 떠봐. 아들 왔어.’
심장박동을 알리는 그래프는 전혀 미동도 없었다. 승우는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힘껏 잡으면 그래프가 조금은 더 힘차게 움직이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래프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선을 이루며 그래프를 그려나갔다. 엄마의 손을 잡고 있던 승우의 손에도 조금씩 힘이 빠졌다. 손을 잡고 있는지 손을 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손에 힘이 빠졌다.
승우는 돌탑을 찾기 전에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들렸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운세를 이야기하던 엄마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다. 얕은 숨을 몰아쉬며 아기같이 쌔액쌔액 거렸다. 곧 깨어나시겠지. 승우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이곳에 누워있고 엄마가 나를 지켜보는 입장이었다면 엄마는 어떻게 했을까. 의사의 말을 믿었을까 아니면 점쟁이 말을 믿었을까.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해도 점쟁이는 굿을 한번 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고 엄마를 꾀겠지. 아니 엄마의 지갑을 꾈 것이다.
승우는 다시금 돌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전히 관광객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탑을 바라보았고 저마다 소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돌을 찾아다녔다. 승우도 그 무리에 묻어 매끄러운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누군가가 올린 돌 위에 살포시 올려보았다.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리고는 여전히 미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돌탑이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았다니까. 엄마도 저 거센 돌탑처럼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진 않을 것임을 믿었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를 되찾을 것임을.
승우의 돌이 오르기 전 바로 밑에 있던 누군가가 올린 돌, 그것이 엄마가 그 전에 올린 돌일지는 알 수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는 내게 너는 놀아달라며 짓궂게 내 품에 파고든다. 읽던 책은 마저 읽고 나가자고 해보아도 이내 무릎을 베고 눕더니 무슨 내용을 읽느냐며 귀찮게 군다. 취미로 플로리스트 과정을 배우고 있던 차라 책을 고를 때에도 이런 장르로만 손이 간다.
꽃말에 관한 책을 읽고 있던 중이다. 꽃말이라고 하면 10대의 여린 감수성에 내게 맞는 꽃말은 어떤 것일까 찾아본 것 이외에는 없었다.
“음~ 장미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아마 빨간 장미가 아닐까 싶어! 빨간 장미는 사랑, 절정, 기쁨, 아름다움이고 하얀 장미는 순진, 존경, 순결이래. 노란 장미는 질투라네!”
“너는 질투가 많으니까 노란 장미가 딱 잘 어울리겠다.”
그러고 보니 너는 장미꽃 한번을 사준 적이 없다. 그 흔한 장미꽃 한 송이도.
“꽃꽂이 하면서 예쁜 꽃들도 많이 봤겠다. 그치? 그럼 넌 어떤 꽃이 제일 좋아?”
“글쎄. 꽃은 다 너무 예쁘고 각자가 가진 매력이 다 달라서. 근데 오늘은 장미!”
“오늘은 장미? 뭐가 그래. 그럼 내일은 또 다른 꽃으로 바뀐단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 뭘. 어차피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들도 다른데 사시사철 같은 꽃만 좋아하라는 법 있어?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빨간 장미!”알아들었을까? 이렇게까지 빨간 장미를 받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데 못 알아 듣는다면 정말 미련 곰탱이라고 불러줄 것이다.
이야기가 금세 또 싫증이 났는지 내가 보고 있는 책을 뺏어가더니 나가자고 성화다. 나가면 어차피 밥, 커피, 영화. 영화, 밥, 커피의 반복일거면서 굳이 왜 나가서 시간을 보내야 하냐고 물으려다 그만 둔다.
“어디 갈 건데?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래서 이렇게 보채는 거야?”
“그냥. 네가 가면 좋아할 만한 곳이 생각이 나서.”
남자친구의 손에 이끌려 온 곳은 풍암호수 수변공원이었다. 그곳은 때마침 장미축제가 한창이었다. 공원 곳곳을 아름답게 수놓은 장미꽃들의 지릿한 향기에 금세 매료되었다. 그곳에는 연인, 가족, 친구 등 다양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더 다양한 종류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장미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문득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가 떠올랐다.
“여기 있는 장미를 다 모으면 백만 송이가 될까?”
“백만 송이? 글쎄. 감이 안 잡히네. 그런데 아니지 않을까? 수백만 송이면 그게 다 얼마야?”
백만 송이 장미의 노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했다. 한 여자를 향한 구애의 도구로 전 재산을 털어 백만 송이 장미를 선물한 남자. 여자는 백만 송이 장미가 주는 아름다움만큼 황홀했을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포토존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생각에서 일까 포즈를 취해가며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확실히 꽃이 예쁜 곳에는 사람이 많았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차례가 돌아왔다.
색색 깔의 장미로 둘러싸인 터널 같은 곳에서 브이자를 그렸다.
천천히 장미꽃을 둘러보는데 장미의 종류가 이렇게 많았나 싶기도 하고 장미처럼 생기지 않은 장미꽃도 많았다. 프린세스 오브 모나코, 코사이, 람피온과 같이 이름들도 모두 귀족적이었다.
“이름들이 하나같이 다 멋있네. 마치 공주님 이름 같아.”
“그럼 얘한테도 예쁜 이름 하나 지어줘봐.”하며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뭐야. 갑자기?”
“뭐긴, 네가 오늘은 빨간 장미가 좋다며. 그래서 준비한 거지. 얼른 이름이나 지어줘.”
“쳇, 둔감한 척 하더니만.”
그렇다면 이 장미의 이름은 빨간 장미를 위하여!
그곳을 떠나온 것이 벌써 햇수로 30년이 넘었다. 언젠가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먹었던 곳.
유난히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자그마한 나무들과 내 키보다 훌쩍 큰 담장에는 담쟁이넝쿨이 올망졸망 매달려 있었다. 담장 한 편에는 키가 자랄 때마다 그어놓았던 선이 있다. 담장을 뒤로하면 아버지가 시원하게 등목을 하시던 물이 졸졸 흐르는 수돗가가 있다. 아버지가 시멘트를 발라놓으시고는 밟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셨는데 돌아다니다 발자국을 쾅하고 박아놓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사 가야겠어.
그때에 아버지는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지만 꽤 울림이 있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엄마에게만 말한 이야기였지만 나와 우리 언니도 우리가 곧 이사를 가야 했음을 알았다. 나는 집을 떠난다는 아니, 동네를 떠난다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언니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언니 왜 그래?”
“왜긴, 이 바보야. 우리 이사 간다잖아. 그럼 이 집에서도 못 살고 친구들도 못 만나게 될 거야.”
그랬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아빠와 엄마가 집을 떠나야 했기에 나와 언니도 집을 떠나야 했다. 유난히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우리 집 뒷동네에는 자그마한 동산이 있었다. 동산에 올라가면 졸졸졸 실개천이 흐르고 풀피리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졸졸졸 실개천이 흐르고 풀피리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늙은 수탁의 울음소리에 눈을 뜨고 얼룩백이 황소의 게으른 울음소리에 잠이 들었다.
서울에 사는 아이들은 시골 근처에만 오면 똥냄새난다고 코를 틀어막았다. 여기에 지내면서 똥냄새라고 여기지 못했는데, 서울 친구들은 여간 깍쟁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똥냄새가 아니고 고향냄새인 줄도 모르는 서울깍쟁이들이었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나서부터 한동안은 마당이 넓던 우리 집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고 울고 있었다.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분위기에, 이제는 남의 집이 되어버린 우리 집을 보고 나는 울었다. 꿈에도 잊히지 않는 우리 집이었다.
언젠가 꿈에서 나는 초인종을 눌렀고 그곳에서 나온 정말 그 집 주인에게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우리 집이었어요. 라고 하며 운 기억도 난다. 지금도 가끔 꿈을 꾸지만 꿈속에만 가면 나는 항상 다섯 살 그때의 어린 나로 돌아간다. 지금은 비록 울지는 않지만 길을 한참 헤매다 찾곤 한다.
이제야 왔다. 그곳에 여전히 실개천이 졸졸졸 마을을 휘돌아 나갔고 얼룩백이 황소는 게으르게 울었다. 담쟁이넝쿨은 내 키보다 훌쩍 큰 담장 전체를 휘감았고 여전히 수돗가의 발자국은 깊게 패여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꿈속에서도 잊히지 않았던 곳.
마당 넓은 집에 돌아왔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환승을 위해 모란역에서 서울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거리 너머로 시끌시끌한 장터가 눈에 띄었다. 오늘이 4일이니 모란장이 선 모양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기일 전후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이곳을 지나지만, 모란시장이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는 줄곧 모란시장 얘기를 하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종종 나를 데리고 시장 구경을 가셨다는 것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지 내 머릿속에는 모란시장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인지 나도 모르는 새에 길을 건너고 말았다.
집 근처에 대형 할인점이 생긴 뒤로 전통시장에 발을 들여놓는 것도 처음이었다. 고무줄 바지와 중국제 그릇들, 가짜 골동품, 싸구려 길거리 간식 등 식재료를 제외하고는 없는 이곳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지를 물었더니, 어머니는 웃으며 ‘다 사람 보러 가는 거지, 뭐.’ 하셨다. 구수한 음식 냄새와 함께 할아버지들의 사투리,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보러 온다더니, 정말 동네잔치 같은 느낌이었다. 개고기로 유명한 모란시장이지만, 장날이라 그런지 애완 강아지며 고양이, 토끼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사람이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귀여워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뽕짝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서 보소. 품바 왔네, 품바!”
노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던 할아버지 몇 분이 일어서시더니 음악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하셨다. 말로만 듣던 품바 공연이 펼쳐진 모양이었다. 색동옷을 입고 연지곤지를 찍은 아저씨들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것을 구경하던 나는 어머니와 함께 모란장을 방문했던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홉 살짜리의 눈에 비쳤던 품바 공연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넋을 쏙 빼놓을 만큼 시끄러운 것이었다. 저만치서 들려오는 흥겨운 가락에 얼마나 넋이 빠졌던지 나는 그만 어머니의 손을 슬그머니 놓고 공연단 앞으로 달려가고 말았는데,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을 또 어머니를 찾아 이리저리 헤맸었다. 삼십여 분을 헤맨 끝에야 울음이 터졌고, 근처에서 사탕을 파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얼른 안아 올렸다.
“왜 그러냐, 아가. 엄마 잃어버렸누?”
나는 고개만 끄덕거리며 엉엉 울었다. 우는 애 달래는 데 옛날 얘기만 한 게 어디 있겠는가. 할머니는 ‘옛날 옛날에 말이야’ 하며 이야기의 서막을 여셨다. 옛날 옛날에 북에서 온 사람 하나가 북한의 산 이름을 따서 ‘모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었다.
“모란봉도 모란봉이지만, 제 어미가 그리워서 어미 모 자를 쓰려고 했다고도 한디야. 딱 이 자리에서 너처럼 ‘엄마, 엄마’ 하며 울었단 거야.”
다 큰 어른이 엄마를 부르며 우는 모습이 우스워 울음을 그친 나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사탕을 빨며 얌전히 어머니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찾아낸 어머니는 내게 매운 꿀밤 한 대를 먹이면서도 사탕을 봉지 가득 담아 손에 들려주셨다.
품바 공연이 끝나고 휑해진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줄곧 모란시장 얘기를 하셨다.
“거기 말이야, 오리도 팔고 병아리도 팔고 네가 좋아하는 커피 사탕도 팔았지.”
내가 어머니만큼 자란 다음에도 어머니는 가끔 비닐봉지 가득 커피 사탕을 사 오셨다. ‘어휴, 엄마는 왜 자꾸 시장 물건을 사오고 그래.’하고 나는 가끔 어머니에게 되려 짜증을 내기도 했다. ‘다 사람 보러 가는 거지, 뭐.’ 하며 멋쩍게 어머니의 모습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수다 좀 떨었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줄기차게 보던 얼굴들이기는 하나, 기혼자 다섯 명이 한꺼번에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요즘은 늦게 하는 결혼이 대세라는데 내 친구 녀석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스물다섯 먹던 해부터 줄기차게 시집을 갔다.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 이렇게. 다들 아홉수를 피하려고 작정을 한 건지 마의 스물아홉 이전에 전부 유부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뒤 나 혼자 독신녀로 남아 저 독한 유부녀들을 상대했다. 친구들은 남편 얘기, 아이 얘기, 아니면 또 다른 애인 얘기에 여념이 없는데, 나는 뭐 일거리 말고는 할 만한 얘기도 없었다. 남자아이돌들을 좋아하긴 하나, 친구 녀석들한테 얘기해봤다 정신 못 차렸다며 잔소리나 들을 테고. 그래서 친구들이 수다 떨 동안 조용히 쭈그린 채로 음식에 심취하거나,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리액션을 해주었다. 아, 가끔 야한 이야기를 할 때는 집중해서 들었다.
그러다 서른다섯 겨울, 드디어 나도 결혼이란 걸 하게 됐다. 상대는 나보다 세 살 많은 회사원. 평소 핥던 아이돌처럼 얼굴이 잘나지도, 몸매가 뛰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래도 같이 있으면 말이 통하고 편안해서 살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준비하던 무렵, 친구 녀석들이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동준씨, 기력은 좀 있어?”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구 녀석들은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만 봤다. 그 중 미경이가 총대를 메고 입을 열었다.
“아니, 너네 애기도 낳을 거라면서 신랑 기운이 좋아야 2세를 낳지.”
순간 얼굴이 좀 붉어졌지만, 미경이 말이 맞다 싶었다. 우린 만나기만하면 서로 죽겠다며 피로를 토하고,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젖힌 채 잠들기 일쑤였다. 이래가지고 어디 자식 보겠나 싶어 걱정이 됐다. 그때 혜진이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입을 열었다.
“우리 다음 주에 광양에 어른 물 받으러 갈 건데, 너도 갈래?”
“어른물이라니, 물중에 어린 물도 있고 늙은 물도 있나?”
“야야, 알아듣게 설명을 해줘야지. 광양에 고로쇠물이 유명하다잖아. 미경이 남편이랑 우리 남편이 요즘 영 골골거리고 지루해서 우리 다음 주에 물 받으러 갈 거야. 고로쇠물이 기력 회복에도 좋고 비뇨기 계통에도 아주 좋다더라고. 너도 갈래?”
결혼준비도 중요하지만, 결혼 후의 생활을 생각하니 갑갑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이나 나나 나이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신혼도 즐기고 아이도 가지려면 역시 몸관리가 필수지! 가구랑 전자제품 들어오는 날짜를 어찌저찌 계산하다보니, 결혼 일주일 전 딱 반나절 정도 시간이 비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바로 광양으로 향했다.
약수통 하나 들고 룰루랄라 가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전혀 달랐다. 왜 난 백운산 중턱을 오르고 있는가! 왜 아무도 나에게 산으로 올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물먹으러 사람들이 이런 산중까지 올라오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정도 걸어 들어가니 평지와 함께 고로쇠나무들이 등장했다. 나무마다 하얀색 물통이 꽂혀 있었고, 나무에 꽂혀 있는 호스를 통해 고로쇠 물이 한 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겉보기엔 그냥 맑은 물인데 이거 한 말에 오만 원씩이나 한단말야? 아깝다. 이 돈이면 족발을 아주 그냥 원 없이 먹을 수 있는데.”
“아서라, 너는 그게 예비 신부가 할 말이냐? 이리 와서 어른 물 한 잔 마셔봐. 고로쇠 물로 끓인 백숙도 죽여줘.”
혜진이의 닦달에 고로쇠 물 한 모금 먹고, 백숙 한 점 뜯었다. 신기하게도 물이 달았다.
“야, 어른 물 생각보다 달고 맛난다. 어른은 쓴물만 먹고 살아야 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단물 먹어도 되는 거야? 어른 좋네.”
그 후로도 나는 한참동안 닭 한 점 뜯고 고로쇠 물 마시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처음에는 한두 잔만 주고, 동준씨 갖다 줄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약수통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동준씨만 기력 차리란 법 있나? 애는 내가 낳는 데 내 몸부터 챙겨야지. 고로쇠 물에 푹 빠져 입맛을 다시는 날 보고 미경이가 말했다.
“지금 많이 마셔 둬. 너 이제 시집가고 나면 쓴 물 배터지게 먹을 테니까.”
나는 약수통 바닥에 남은 고로쇠 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잔에 부었다. 그리고 잔 바닥까지 핥아 마셨다. 캬, 어른 물 달다.
딸아이가 또 무릎이 다 까져서 왔습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그랬는지 빨갛게 살갗이 찢어져서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들어옵니다. 흐르는 물에 상처를 씻어주고 바람을 호호 불어주었지요. 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다시 생기를 되찾습니다.
어릴 적 넘어져 무릎이 다치거나 상처가 나면 우리엄마도 반창고를 붙여주지 않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저 깨끗한 물에 씻고 소독을 하여 바람을 쐬어주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셨지요. 여섯 살에 나는 우리 엄마가 계모인가 생각한 적이 있답니다. 나도 친구들처럼 예쁜 곰돌이 반창고를 붙이고 싶었는데 엄마는 상처가 덧난다며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독약을 발라주고 따가울까 봐 호호 불어주는 모습을 보고 우리 엄마로 확신을 하긴 했지만요.
사실 상처가 난 곳에 물이 닿고 소독약이 닿으면 따갑기 때문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인데 엄마는 그것도 모르나 보다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에 씻어 치료하는 것은 할머니 때부터 엄마까지 쭉 이어져 내려온 치료법으로 다 이유가 있다고 했지요.
옛날 신라와 백제가 전쟁 할 당시 싸움에서 크게 다친 아들의 약을 애타게 찾던 어머니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백설이 온 땅을 뒤덮은 곳에 날개를 다친 학 한 마리가 눈이 녹은 물웅덩이에 날개를 적셔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들의 상처를 물에 담그게 하여 치료하였다는 전설이 있다고 말이지요. 엄마는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들은 체 만 체하였답니다.
엄마는 할머니와 동네에 아주 오래된 온천에 자주 가셨습니다. 전설이야기도 여기에서 들은 이야기이지요. 동네에 으리으리하게 세워진 좋은 찜질방들도 많은데 엄마랑 할머니는 꼭 유성온천으로 가셨답니다. 특히 몸이 여기저기 쑤신다거나 마음에 근심이 쌓이면 어김없이 온천을 찾으셨지요. 한참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먼저 나가겠다고 투정을 부리면 엄마는 온천을 하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는 것처럼 마음도 개운해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마음에 근심이 물에 씻겨 내려간다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친구들이랑 놀기보단 엄마랑 온천에 가는 일이 더 잦았습니다. 엄마는 꼭 수고했다고 온천에 가 그동안의 몸 고생, 마음고생을 다 씻겨 보내라고 하셨지요.
지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가 더 그립습니다. 엄마와 마지막으로 온천에 갔던 날이 떠오릅니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으시고는 말씀하셨다.
"그저, 몸이나 마음이나 같은 법이다. 상처가 덧날까 꽁꽁 싸매고 있으면 그 속이 더 곪아 터지는 법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셨지요.
어렸을 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숨이 턱턱 막히는데 왜 그렇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그런데 지금 이렇게 엄마를 그리워하며 내 딸아이의 손을 잡고 유성온천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엄마의 말에 일리가 있나 보다 생각이듭니다. 내가 지금 이곳에서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내 딸아이도 나를 기억할까요?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지는 날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졌던 월미도는 연인들의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노르망디상륙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이라고 불리는 인천상륙작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 나는 자연스레 다시 이곳을 찾았다.
어머니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셨던 아버지를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발생한 여덟 명의 전사자 중 한 분은 아니셨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으셨지만, 전쟁에 대한 후유증으로 힘들어 하시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전쟁이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전쟁을 회상하시면서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으셨다.
“네가 그 자랑스러운 분의 딸이란다.”
어릴 때부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의 어머니는 항상 환하게 웃고 계셨다.
문득 십 년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에는 너무 무거운 분위기의 기념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큰애인 미현이도, 작은 애인 미정이도 여기저기에 자리한 총을 든 군인들과 탱크들의 모습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울먹이며 보채는 어린 딸들 때문에 기념관을 자세히 둘러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아이들도 대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 그런지 사뭇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런 딸들을 보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라면, 참전자의 가족들은 이곳에 와서 울음을 터뜨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아이들도 전쟁을 피부로 겪어 본 세대는 아니었다. 나조차도 이곳에 있는 전쟁의 기록들이 어렵기만 한데, 딸들에게는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유월 이십오 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단체로 관람을 온 아이들이 많았다. 원복을 입고 노란 가방을 멘 유치원생들은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물이 글썽해진 아이도 있고, 친구의 손을 꼭 잡은 아이도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상하기만 한 일인 것 같았다.
“선생님! 전쟁이 또 일어나면 어떻게 해요?”
흑백으로 찍힌 전쟁 사진들을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질문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스쳐 지났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나조차도 전쟁은 먼 나라의 이야기 같게만 느껴지는데 말이다.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 이야기를 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교과서를 통해, 방송을 통해 전쟁 이야기를 접할 때에도 눈물이 나기는커녕 ‘아, 저런 일이 있었구나. 잊지 말아야지.’하는 단편적인 감상밖에는 들지 않았다. 유월이 될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쓰는 말인 ‘호국영령’ 중 한 명이 바로 우리 아버지인데도 말이다. 몇 십 년이 지난 뒤에 내가 죽어 아버지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 아픔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해야 할 텐데 그것이 너무 어려웠다.
야외 전시장을 지나 기념관을 나서려는데 미정이가 나를 불렀다. 딸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벽을 오르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한 청동상이 있었다.
“엄마, 이것 좀 봐요. 이 중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있을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어찌 할 수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 어머니의 얼굴 대신, 부엌에서 숨을 죽여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아픔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