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환승을 위해 모란역에서 서울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거리 너머로 시끌시끌한 장터가 눈에 띄었다. 오늘이 4일이니 모란장이 선 모양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기일 전후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이곳을 지나지만, 모란시장이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는 줄곧 모란시장 얘기를 하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종종 나를 데리고 시장 구경을 가셨다는 것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지 내 머릿속에는 모란시장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인지 나도 모르는 새에 길을 건너고 말았다.
집 근처에 대형 할인점이 생긴 뒤로 전통시장에 발을 들여놓는 것도 처음이었다. 고무줄 바지와 중국제 그릇들, 가짜 골동품, 싸구려 길거리 간식 등 식재료를 제외하고는 없는 이곳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지를 물었더니, 어머니는 웃으며 ‘다 사람 보러 가는 거지, 뭐.’ 하셨다. 구수한 음식 냄새와 함께 할아버지들의 사투리,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보러 온다더니, 정말 동네잔치 같은 느낌이었다. 개고기로 유명한 모란시장이지만, 장날이라 그런지 애완 강아지며 고양이, 토끼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사람이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귀여워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뽕짝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서 보소. 품바 왔네, 품바!”
노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던 할아버지 몇 분이 일어서시더니 음악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하셨다. 말로만 듣던 품바 공연이 펼쳐진 모양이었다. 색동옷을 입고 연지곤지를 찍은 아저씨들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것을 구경하던 나는 어머니와 함께 모란장을 방문했던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홉 살짜리의 눈에 비쳤던 품바 공연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넋을 쏙 빼놓을 만큼 시끄러운 것이었다. 저만치서 들려오는 흥겨운 가락에 얼마나 넋이 빠졌던지 나는 그만 어머니의 손을 슬그머니 놓고 공연단 앞으로 달려가고 말았는데,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을 또 어머니를 찾아 이리저리 헤맸었다. 삼십여 분을 헤맨 끝에야 울음이 터졌고, 근처에서 사탕을 파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얼른 안아 올렸다.
“왜 그러냐, 아가. 엄마 잃어버렸누?”
나는 고개만 끄덕거리며 엉엉 울었다. 우는 애 달래는 데 옛날 얘기만 한 게 어디 있겠는가. 할머니는 ‘옛날 옛날에 말이야’ 하며 이야기의 서막을 여셨다. 옛날 옛날에 북에서 온 사람 하나가 북한의 산 이름을 따서 ‘모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었다.
“모란봉도 모란봉이지만, 제 어미가 그리워서 어미 모 자를 쓰려고 했다고도 한디야. 딱 이 자리에서 너처럼 ‘엄마, 엄마’ 하며 울었단 거야.”
다 큰 어른이 엄마를 부르며 우는 모습이 우스워 울음을 그친 나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사탕을 빨며 얌전히 어머니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찾아낸 어머니는 내게 매운 꿀밤 한 대를 먹이면서도 사탕을 봉지 가득 담아 손에 들려주셨다.
품바 공연이 끝나고 휑해진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줄곧 모란시장 얘기를 하셨다.
“거기 말이야, 오리도 팔고 병아리도 팔고 네가 좋아하는 커피 사탕도 팔았지.”
내가 어머니만큼 자란 다음에도 어머니는 가끔 비닐봉지 가득 커피 사탕을 사 오셨다. ‘어휴, 엄마는 왜 자꾸 시장 물건을 사오고 그래.’하고 나는 가끔 어머니에게 되려 짜증을 내기도 했다. ‘다 사람 보러 가는 거지, 뭐.’ 하며 멋쩍게 어머니의 모습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말인 오늘은 승호가 가장 기다리는 날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아빠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나는 날이기 때문이지요. 눈을 뜨자마자 승호는 아빠에게 달려갑니다. 오늘의 목적지가 궁금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빠는 어떤 영문인지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아빠 다리에 매달려도 보고 힌트라도 달라고 졸라보아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돌아오는 말이라고는 그저 잠자코 아빠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궁금증과 기대에 한껏 들뜬 승호는 연신 싱글벙글하며 동생인 연호에게 자랑도 늘어놓았습니다. 드디어 출발입니다. 아빠 차에 탄 승호는 엄마와 동생에게 인사를 한 뒤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는 바람에 승호는 그만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출발한 뒤 무려 3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잠에서 깬 승호는 도로 이정표를 보고 강원도 태백에 와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승호는 속으로 오늘 아빠와 둘이 등산도 하고 맛있는 한우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 그런데 도착한곳은 태백산도 아니고 한우고기집도 아닌 석탄박물관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급격히 실망한 승호는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아빠가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고 여기로 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일단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책에서만 보던 광부들이 캄캄한 동굴에서 석탄을 캐는 모습과 그 시대 광부들의 삶을 모형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형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아빠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옛날에 승호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니까 아빠가 딱 승호만한 나이였을 때였어.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승호 할아버지는 여기 보이는 사람들처럼 석탄을 캐는 광부셨어. 할아버지도 이렇게 검은 때가 온 몸을 뒤덮어도 열심히 일하셨지. 우리 승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삼겹살 있지? 그것도 사실 이렇게 하루 종일 탄가루에 뒤덮여 있는 광부들이 검은 가루가 씻겨 내려가라고 먹었던 음식인거 알았니?
그리고 아주 가난하던 시절 가족들의 끼니와 교육을 위해 앞이 보이지도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 막장에서 땀 흘려 일하셨단다. 할머니는 노란 양은 도시락에 부족하지만 정성스레 담은 도시락을 매일 싸드렸어.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지. 달그닥 달그닥 빈 도시락 통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도 반가운 마음에 버선발로 뛰어나가셨던 모습이 생생해. 석탄 캐는 일이 목숨을 내놓고 일할만큼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도시락 소리가 들려야만 안심을 하곤 했었지. 승호 넌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정말 멋진 일을 하시던 분이셨어.”
이야기를 하는 아빠의 눈이 잠시 붉어졌습니다. 개구쟁이 승호도 이야기를 듣고는 얌전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습니다. 아빠가 왜 오늘 다른 곳이 아닌 태백에 석탄박물관에 왔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승호는 4시부터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두 시간 뒤에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실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승호는 아빠와 석탄박물관에서 들었던 아빠의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아 아빠도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빠 몰래 승호가 맛있는 저녁밥을 만들어드리기로 마음먹은 것이지요. 서툰 솜씨지만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아빠가 들어오셨습니다. 으쓱한 마음에 승호는 아빠에게 달려가 품안에 쏙 안기며 아빠를 위한 멋진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했습니다.
삼겹살에 돼지고기 김치에 돼지껍데기 등 돼지고기로 가득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빠 귀에 대고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아빠, 아빠도 할아버지처럼 정말 멋진 아빠에요!”
아빠도 승호도 정말 푸짐하고 따뜻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쏴아아 부서지는 파도소리만 무성하다. 시간을 조금 더 지체하면 학교에 지각을 할 시간이지만 애꿎은 모래알만 매만지고 있다. 걸어갈 때마다 도시락 가방에서 나는 달각달각 수저 부딪히는 소리가 싫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엄마는 늘 억척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순댓국 장사만 벌써 20년째다. 늘 푹푹 찌는 큰 솥 앞에서 걸핏하면 대낮부터 술 한 잔 걸친 공사판 아저씨들 앞에서 걸걸한 말을 하며 지낸 세월이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늘 도시락에 머릿고기와 순대 그리고 새우젓만 싸주셨다. 나는 그런 엄마가 미워 일부러 도시락을 놓고 간 적도 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신애는 점심시간이 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엄마는 내가 일부러 놓고 간 것을 알아챘는지 복에 겨워서 저런다며 한 소리 했다.
모래알만 매만지던 나는 터덜터덜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국어시간이었고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를 배웠다. 모래톱이야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건우의 이야기인지 나 자신의 이야기인지 모를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나룻배를 타고 통학하는 건우.
갯배를 끌고 나가 통학하는 나.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가진 섬마을에 사는 건우.
실향민들로 이루어진 아바이마을.
내가 살고 있는 아바이 마을은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적셔있는 마을로 어려웠던 전후시대를 살아오며 고단하고 억척스러운 곳이었다.
부둣가로 올라오면 생선 비린내가 자욱했고 쪼그려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움푹 파인 마음의 주름을 부서지는 파도에 쓸어내리는 그런 곳.
나는 창밖에 부서지는 모래성을 바라보았다. 아슬아슬 하얀 거품에 스러지지 않기 위해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는 모래성이다. 쏴아아 쏴아아 겁 없는 파도는 모래성으로 돌진하였고 결국 파도는 모래성을 집어삼켰다.
모래톱 이야기에서 건우는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분단으로 인해 고향으로 가지 못한 설움이 남아있는 곳. 파도가 그 설움마저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다. 무심하게 발로 도시락 가방을 톡 건드려본다.
‘달각’ 소리를 낸다.
윗동네에 사는 은서가 도시락 가방을 들고 내 자리로 왔다. 나란히 앉아 도시락 가방을 연다.
은서는 새하얀 쌀밥에 멸치볶음에 장조림을 싸왔다. 내 반찬은 어김없이 머릿고기에 순대 그리고 새우젓일까.
어쩌면 나도 멸치볶음에 장조림을 싸주지는 않았을까?
창밖의 갯배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왔다 갔다를 반복한다. 신기한 듯 갯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갯배를 타고 오고간다. 신기한 듯 배를 타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드라마 때문일까 어느 날 부턴가 갯배는 헤어진 연인들의 아련한 추억의 공간이 되었고 짙은 녹색에서 희미한 푸른색의 느낌을 띄기도 했다.
반찬통을 열기도 전에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도시락 가방을 두고 갔던 날.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내가 싫었던 건 엄마도 아니고 돼지 비린내도 아닌 ‘달각’소리였다는 것을.
결혼을 앞둔 여자의 목소리는 한껏 흥분과 설렘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 그녀에게 세상은 핑크빛일 테고 파스텔 톤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상견례와 결혼 날짜까지 한 큐에 끝내버리고 요즘은 친정엄마와 혼수를 보러 다니고 피부숍을 다니며 생애 한번 있을 아름다운 날을 위해 온 신경을 쏟았다.
서른둘의 나이. 요즘으로 치면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라지만 먼저 결혼한 친구들의 훈수 덕에 그녀의 머릿속은 적잖이 복잡해졌다. A는 근사한 카페를 통째로 빌려 피아노를 치며 영화의 한 장면처럼 프러포즈를 받았다더라. 친구 B는 청담동으로 시집간다더니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몇 세트를 받았다더라 하는 말들이 자연스레 들렸고 친구들은 며칠 굶주린 하이에나들처럼 여자의 결혼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자는 신경 쓰지 않고 남자친구에게 내색하지 않기로 마음먹고도 내심 신경이 쓰였고 기대가 되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그럴 거라며 자신은 속물이 아니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남자친구에게 대뜸 나 어디서 어떻게 프러포즈해줄 거냐.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줄 거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무엇보다 남자친구의 형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여자의 얼굴엔 점점 그늘이 드리웠다.
오늘 예쁘게 입고와. 일 끝날 때 맞춰서 데리러 갈게.
남자친구의 문자다. 여자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예쁘게 입고오라니, 왜? 혹시 프러포즈하려고 그러나? 그렇담 뭘 입어야 하지? 야외에서 하면 좀 쌀쌀할 텐데 겉옷을 준비해갈까? 눈물을 흘려야 하나? 여자는 30초간의 짧은 순간에 몇 가지 생각들을 흘려보냈다.
귀여운 것. 조금 무뚝뚝하긴 했어도 예쁘게 입고 오라는 힌트까지 주다니. 여자는 한껏 들뜬 마음을 즐겼다. 언제 또 이렇게 행복하겠느냐며 이 순간을 즐기자고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이 아끼던 옷을 꺼내 입고 싱글벙글 하며 남자를 기다렸다. 남자는 칼같이 여자를 데리러 왔다.
“어디 가는 거야? 어디로 가는 건데? 응? 왜 예쁘게 입고 오라고 했어? 어?”
여자는 남자의 차에 타자마자 콧소리를 내며 남자에게 질문을 쏟아 부었다. 남자는 가보면 안다며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고 여자의 기대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그런데.
남자는 카페를 빌리지도 근사한 곳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지도 않았고 무릎을 꿇으면서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심히 스윽 건네는 반지케이스 하나.
이게 뭐야. 여자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준비해왔으나 서러움으로 흘릴 줄은 몰랐다. 여자는 기쁨도 감동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반지케이스만 바라보았다.
“실망했어?”
그걸 말이라고. 여자는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내뱉지 않았다.
“어떤 반지인지 궁금하지 않아?” 라고 말하며 반지케이스를 열었다.
붉은빛이 선명한 반지다. 루비인가. 동시에 남자가 말한다.
“루비 아니야. 빨간색을 띄는 희귀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내가 하늘에 떠있는 별을 따다 달래 달을 따다 달래. 그냥 말 한마디 아니 말 한마디가 어려우면 꽃이라도 아니 꽃도 어려우면 노래라도. 그만하자.”
“알아. 네 마음. 섭섭하겠지 속상하겠지. 그런데 반지 꽤 의미 있는 거야. 이게 1월 탄생석으로 만든 거거든. 당신 생일이자 우리 결혼기념일이 될 1월.”
여자는 애써 침착하게 반지를 바라보았다.
“다음번 결혼기념일에는 근사한 카페도 빌리고 백송이 꽃도 준비하고 피아노도 배워서 노래도 불러줄게. 더 예쁜 반지와 함께.”
좀 전에 남자가 내민 보석은 가넷이었다.
흰 눈발이 내리는 겨울이면 어김없이 군고구마 장수와 붕어빵 장수가 눈에 띤다. 집 앞 작은 골목 앞에 있는 따끈한 붕어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골목에 고소한 붕어빵 냄새가 나면 출출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흰 봉지에 군고구마와 붕어빵을 가득 담아가며 함박미소를 지었다.
"붕어빵 천 원어치에 몇 갭니까?"하고 물으면 "세 개 인데 네 개 드릴게요."하며 따뜻한 마음까지 덤으로 주시곤 했다.
아버지는 유난히 이곳 붕어빵을 좋아하셨다. 내가 간혹 빈손으로 들어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거기 붕어빵 장수 오늘은 쉬나? 하며 내심 붕어빵장수의 안부까지 물으시곤 하셨다. 아버지 덕분에 붕어빵 포장마차의 단골이 된 나는 가끔 붕어빵 장수와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붕어빵 장수는 한쪽 눈이 불편한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붕어빵을 휙휙 돌릴 때면 그 노련함에 박수를 칠 뻔한 적도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버지를 위한 붕어빵을 사가려고 포장마차에 들렀다.
“또 오셨네요.”
“네. 오늘은 날씨가 더 추워진 것 같아요. 오래 서계시면 감기 드시겠어요.”
“저는 불 앞에 있는데요 뭐. 추운 줄도 몰라요. 오늘도 아버지 붕어빵 사드리려고 오셨나봐요?”
“저야 그렇지요 뭐,”
“허허. 그런데 아버님은 붕어빵 질리지도 않으신대요?”
“질리긴요. 언제는 깜빡하고 빈손으로 가면 섭섭해 하신다니까요. 그래서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요기 포장마차 열었나 안 열었나부터 확인한다니까요.”
“아무튼, 매번 참 고마워요. 단골이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추우실텐데 이거라도 하나 드시고 계세요.”
“아저씨는 몸도 불편하시고 추우실텐데 어쩜 매년 겨울이면 하루도 안 빼먹고 이렇게 나오세요?”
“춥지요. 추운데 이렇게라도 안하면 집에 혼자 계시는 노인네가 더 추울 것 같아 이렇게 몇 푼이라도 벌어 가는 거지요. 그래야 집에 불도 피우고 생선 한 마리라도 사가지요. 이런 말도 부끄럽지만.”
“부끄럽긴요. 우리 동네 효자가 여기 계셨네.”
“효자라니 당치도 않아요. 그저 살아계실 때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드려야지 하는 마음이지요.”
그렇게 말을 하는 아저씨의 장갑은 많이 낡아있었다. 목장갑은 붕어빵을 돌리는 꼬챙이 때문에 닳아 구멍이 나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가 보세요.”
“네, 안 그래도 오늘 아버지 생신이라 일찍 들어가려고 했어요. 남은 붕어빵은 아버님께 드리는 제 선물이에요. 단골분께 드리는 제 선물이요,”
아저씨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흰 봉투 가득 붕어빵을 담아주셨다. 아저씨의 한쪽 눈은 찡그러져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 밝은 웃음을 지으며 손수레를 끌고 오르막을 올라갔다.
혼자 계실 아버지를 위해 여느 때보다 밝은 웃음을 지으며 오르고 또 올라갔다.
양손 가득 붕어빵을 들고 집에 들어가니 아버지가 모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신다.
“무슨 붕어빵을 이리 많이 사왔노? 붕어빵 털어 왔나?”
“네. 붕어빵 장수가 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이래요. 아버지가 좋아하시니까요.”
“그래? 고맙네. 고마워.”
아버지는 달고 따뜻한 붕어빵을 머리부터 덥석 드셨다. 품에 품고 와서 그런지 붕어빵에서는 아직도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약간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큰기러기의 보드라운 깃털 사이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이제 가을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강가는 아직 활기차다. 논병아리 가족들이 줄지어 쪼르르 헤엄치고 있고 청둥오리들도 무리지어 강가를 누볐다. 강가에서 유일하게 혼자인 희망이는 강가를 빙빙 돌며 헤엄쳤다.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희망이는 날개를 괜히 접었다 폈다 하며 빨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희망이는 큰기러기이다. 일찍이 가족들과 이별한 희망이는 강가에서 늘 외롭게 떠돌았다. 간혹 친구들을 사귀기 하였지만 그런 친구들은 금세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래서 희망이는 더욱 외로움에 자신을 가두기도 하였다.
별이 쏟아질 듯한 밤이 오자 희망이는 샛노란 달님을 보며 어김없이 가족들을 그리워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찬바람이 제법 쌀쌀해졌고 강가를 누비던 논병아리 가족들과 청둥오리도 서로 몸을 맞대며 추위를 견뎠다. 이제 겨울이 온 것이다. 외로운 희망이는 몸을 맞댈 가족도, 친구들도 없었다. 또 홀로 날개를 펄럭이며 강가를 빙빙 돌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그때 한 무리의 오리 떼들이 날아왔다. 언뜻 봐도 어마어마한 수의 오리 떼들이 날개를 펼치며 강가로 내려왔다. 희망이도 오리 떼들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수는 처음이었다. 큰 눈이 더욱 휘둥그레져 오리 떼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많은 오리의 무리에서 유난히 초록색의 멋진 머리를 가진 오리 한 마리가 희망이에게 다가왔다. 희망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고 초록색의 머리를 가진 오리는 희망이에게 자신은 가창오리라고 소개를 했다. 희망이도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고 가창오리는 잘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늘 홀로 강가를 헤엄치던 희망이는 무리지어 헤엄치는 가창오리가 부러웠다. 일제히 하늘을 검게 수놓는 모습도 부러웠다. 그렇지만 가창오리들은 봄이 지나면 다시 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혼자가 될까 두려운 희망이는 가창오리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또다시 상처를 받을까 봐 가창오리 주위만 맴돌 뿐 가까이 가지 못했다. 그렇게 선뜻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희망이를 위해 가창오리는 갈대를 꺾어 피리도 불어주고 예쁜 꽃을 날개에 달아주기도 하였다. 어느새 마음을 열게 된 희망이는 가창오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멋지게 하늘을 날기도 하고 누가 더 빨리 헤엄칠 수 있는지 내기도 하였다. 붉은 노을이 스르르 하늘을 물들일 때 일제히 하늘을 수놓는 가창오리의 춤사위를 부러워하던 희망이도 파르르 날아올라 그 무리에 슬쩍 껴보기도 하였다. 시간이 흘러 못 보던 텃세들과 나그네새들이 날아와 친구가 되기도 하였다.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던 희망이었지만 가창오리와 함께 지내면서 먼저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아니, 봄의 마지막이 왔다. 이제 가창오리들은 다시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할 때였다. 희망이는 슬퍼졌다. 가창오리의 주변을 빙빙 맴돌 뿐이었다. 가창오리는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희망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 할 때가 왔다. 코끝이 찡해지고 날개가 떨려왔지만 희망이는 입을 꾹 다물며 떨어지려는 눈물을 삼켰다. 어젯밤 달을 보며 가창오리가 떠날 때 울지 않겠다고 가족들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웃으며 가장 멋진 모습으로 떠나보내 주겠노라고 다짐을 한 희망이는 가창오리에게 잎사귀로 만든 멋진 나비넥타이를 선물하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가창오리도 희망이와의 추억을 잊지 않겠다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라는 인사를 했다.
가창오리는 힘차게 날아올랐다. 가창오리가 날아오르자 나머지 오리들도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희망이를 위한 마지막 군무를 보였다. 붉게 물든 하늘위로 검은 가창오리 무리가 높게 날아올랐다가 아래로 내려오더니 희망이의 모습을 하늘에 수놓았다.
“안녕! 희망아, 가을이 되면 다시 돌아올게. 그때까지 건강해야 해!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희망이도 하늘을 보며 있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가창오리 떼들이 먼 길을 떠나고 나서야 희망이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잘 가! 가창오리야! 보고 싶을 거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희망이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가창오리와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창오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희망이의 아름다운 날들은 계속될 것이다.
반만년의 무게를 담고 오랜 세월의 흐름은 무상한 듯 고요히 흐르는 푸른 한강 위에 돛단배가 유유히 흐른다. 노를 젓는 사공도 없이 뉘엿뉘엿 흘러가는 강물 따라 흘러내려 간다. 저 멀리 보이는 포구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푸른 한강에서는 한가롭게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다. 강나루에는 신록이 짙어져 버드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아차산의 푸름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나는 아차산에 올라 광나루를 내려다본다. 언젠가는 이란 경치를 벗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작은 텃밭에서 상추, 고추, 가지 등을 가꾸면서 낚싯대 하나 등에 메고 패랭이 하나 쓰고 그저 느긋하게 낚시를 즐기고 싶다. 광나루에 앉아 낚시 던져놓고 그저 여유롭게 낮잠이나 자는 삶이 얼마나 한가하지만 여유로울까.
나는 현재의 최고 명문가인 안동 김씨의 후원을 받고 있다. 나는 그를 위해 그의 집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려줬다. 내가 그린 청풍계 그림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사람들은 신선의 솜씨라며 나를 칭송한다. 여기에 성상께서도 나를 후원해 주고 계신다. 나는 성상을 세제(世弟) 시절부터 그림 스승이었을 정도다. 하지만 나의 예술혼은 채워지지 않는다.
수십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림을 본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어찌 이런 그림을 단 3일 만에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사람의 솜씨가 아니다.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자신이 사는 곳을 그려냈구나.”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마음을 뺏기고 어찌하면 나 역시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수없이 고민하고 수없이 그리기를 수십 년. 수백 장의 화선지에 검은 묵과 종이의 여백을 살려 수없이 그리고 찢기를 반복하고 있다.
내가 이곳 광나루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아차산과 한강이 어우러지는 아리따운 경치와 함께 이곳은 권문세가들의 별장이 있어 자연과 인간의 건축물이 잘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모습과 우리의 시대를 한 폭의 그림에 그리고 싶다. 마치 신선이 사는 몽유도원도처럼...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그리고 내가 사는 현재를 그리고 싶을 뿐이다. 아차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나루터에 묶인 두어 척 나룻배와 한강을 가로질러 쉴 새 없이 다니는 돛단배, 그리고 그 안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가득 타고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풍류를 즐기고 있다. 나는 그리고 싶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신선이 노니는 곳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해 나는 전통적 수묵화법이나 채색화를 나 나름대로 해석해 나만의 필묵법을 개발했다. 세간 사람들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내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는 선비나 직업 화가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겸재파 화법이라 부른다고 한다.
나는 이제 나만의 화법으로 '광진'을 그리고 있다. 광진은 도성 안에서 살곶이다리를 거쳐 광진길을 따라 이르게 되는 강나루로, 여기서 배를 타야 강 건너 삼전도로 갈 수 있다. 이상향의 존재하지 않는 산수를 그리는 것이 아닌 실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산수를 하나의 붓으로 백색 화폭에 담아 꿈을 꾸는 것 같은 환상을 자아내고 싶을 뿐이다. 그것의 나의 ‘광진’인 것이다.
선농제는 농업 신인 신농과 후직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지내는 제사다. 선농제는 제왕의 왕도정치를 실천적인 권농책으로 강조해 일찍이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다. 예전에는 음력 1월인 맹춘에 지냈다고 했는데 지금은 너무 추워 파종을 못하기 때문에 개구리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 뒤의 좋은 날을 골라 시행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경칩이 지나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임금님께서 곧 친경(임금님이 직접 참여하는 행사)하시는 날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다. 올해는 음력 2월 9일 춘분에 맞춰 친경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 궁궐에서는 임금님 행차에 앞서 이것저것 준비에 바쁘다.
임금님께서는 지난해 춘경을 하시며 상언과 격쟁을 열어 이야기를 직접 들으셔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상언은 일반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글로 호소하는 것이고, 격쟁은 임금의 행차 중에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는 것인데 임금님께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문제 해결을 지시하기도 했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가뭄과 홍수를 겪고 있어 백성은 백성대로 굶주리고, 임금은 임금님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부덕 때문이라며 눈물을 보이시는 날이 많다. 그럴 때마다 임금께서는 신하들에게 거리낌 없이 말하라며 직언을 요청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민생을 살피기 위해 궁을 나서기도 하신다고 한다.
드디어 선농제의 날이 다가왔고 임금께서는 선농단이 있는 제기동으로 행차 하셨다. 올해도 가뭄이 심했다. 임금께서 하문하시길 “가뭄이 너무 심하다. 소나기가 내렸지만 안개가 끼고 흙비가 왔을 뿐이다. 기후가 이렇듯 순조롭지 못하니 벼농사 형편이 걱정되는구나.”라 셨다.
청계천을 따라 행차가 이어지고 동대문을 지나심에 들녘을 돌아본 뒤 말문이 막히신 듯. “날이 가물어 지력이 약해진 것을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원래 이 땅은 비옥한 편인가, 메마른 편인가?”라면 대언에게 물었다. “원래 이 땅은 메마른데다가 가물어서, 작년 홍수로 농사가 잘 안됐습니다.” 그러나 대언을 거짓을 고한 것이다. 원래 비옥한 땅인데 침통한 임금님의 용안을 본 그가 거짓을 아뢴 것이다.
선농단에 도착하신 임금님께선 풍요를 비는 선농제를 지내시고 하늘을 우러러 비를 내려 주십사 기우제를 지내셨다. 임금께서는 이농기의 가뭄과 여름철 홍수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생각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하늘에게 비를 내려 달라 빌고 또 빌었다. 선농제가 있는 오늘도 봄 가뭄으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선농제, 기우제가 끝나고 어느덧 많은 시간이 흘러 임금께서 서둘러 환궁해야 할 시간이 됐다. 임금님의 가마가 움직이는 순간, 거짓말처럼 하늘에서는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메마른 땅을 적셔주는 굵은 빗방울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백성과 신료들이 뛸 듯이 기뻐하며 너나 할 것 없이 춤추고 흥에 겨웠다. 하지만 많은 비로 땅이 질어져 임금님의 가마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겼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환궁하기로 했고 임금님의 수라상을 올릴 시간이 됐다.
하지만 임금님과 대신들 이외에 먹거리가 부족해 군관들이나 궁녀, 의원 등과 같은 궁인들은 먹을 게 없었다. 수라상을 받은 임금께서는 작년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과 궁인들이 배를 곪고 있는데 어찌 혼자만 수저를 들 수 있느냐며 수라상을 물리라 하셨다. 어의와 대신들은 임금님의 하면을 거둬 달라 간청했다. 임금님께서는 모두가 같이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셨지만 인근 백성들도 배를 곪고 있는 춘궁기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때 임금님은 선농제에 풍년을 기원하며 쓴 소를 보시고는 그럼 소를 잡아 물어넣고 끓여 다 같이 허기를 달래자 하셨다. 이윽고 대신과 많은 궁궐 사람들, 굶고 있는 백성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쇠뼈와 고기를 삶아낸 국물에 밥을 말아 많은 사람들이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백성들은 임금님에 대한 칭송이 더 높아졌다. 그 후 백성들을 생각하며 선농제를 지내고 경작에 쓰인 소를 잡아 선정을 베푼 임금님의 높은 애민정신을 생각하며 그 음식을 선농탕이라고 불렀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설렁탕이 됐다. 어떤 사람들은 소를 잡아 설렁 설렁 끓여 설렁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설렁탕은 끓는 물에 뼈와 고기가 오랫동안 우러나야 진한 맛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설렁탕은 임금님의 백성을 굽어 살피신 마음이 베여있어 더욱 진한 향기가 나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