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이렇게 뛴다네. 내가 이 합천 흙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네.
이 늙은 소나무가 하는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겠나?
때는 고종23년 때였지. 그때의 고려는 바람이 부는 등불 앞에 촛불과 같았다네. 몽골의 침입이 끊이질 않았고 전쟁 통에 백성들은 두려움에 치를 떨었지.
끊임없는 약탈과 협박으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지. 왕실이 휘청거렸지만 무신들은 달랐다네. 끝까지 싸워 이기고자 하였지.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네. 끝이 보이지 않던 전쟁에 몽골군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을 게야. 그래서 그때의 고려의 힘과 정신으로 버텨가던 맥을 끊어버리려 했던 거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시커멓게 타는 것 같다고.
성벽만 공격하던 몽골군은 군사를 이끌고 대구 부인사로 향했다네. 그리고 그곳에 모셔두었던 초조대장경 판목을 불에 태워버렸어. 나라의 뿌리였고 백성들이 버티고 버티던 마지막 정신이 함께 불타버린 것과 같았다네. 당시 고려는 불교를 나라에 힘이라 믿었고 나라가 부강해 질 수 있는 원동력이라 믿었다네. 그런데 그러한 대장경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만 셈이지.
백성들은 물론이고 고려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고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천리 밖 아니 만리 밖까지 새어나가, 문인들과 무인들은 혼란 속에 빠진 백성과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대책마련이 시급했다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도가 하나 있었지. 바로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고 다시금 민심을 끌어 모으기 위한 팔만대장경을 만들기로 한게야. 하지만 팔만대장경을 만든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 계속된 전쟁 통에 대장경을 만들 재료도 부족했고 나무도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습도와 통풍이 잘 되는 곳에 터를 잡아야 했어. 그래서 이곳에 그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팔만대장경 재건에 나섰다네.
부처의 말씀을 목판에 새겨 넣은 것으로 먼저 굵기가 40cm이상이 되고 곧은 나무를 베어 길게는 2년 정도 진을 빼야 한다네. 경판 하나 준비하는 것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지.
그런 뒤 경판이 건조되어 비틀어지지 않도록 경판을 소금물에 담 궈 두었다가 건조를 해야 한다네. 그렇게 소금물에 삶고 찌며 온 정성을 다해야 했다네.
그렇게 판자가 만들어지면 정해진 두께에 맞게 판자를 다듬어 나가야 한다네. 그리고 경판을 새길 때에는 엄밀하고 정성스럽게 새겨야 했다네.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말이네. 이때에 경판을 작업한 스님들은 글자 한자 한자를 새길 때마다 절을 하였다네. 그리고 글자를 새겨 넣을 때에는 먹지도 자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지.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민심을 되돌릴 수 있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한 자 한 자를 새겨 내려갔다네.
한 획 한 획 지극히 간절한 믿음을 쏟아냈고 혼을 불어 넣었다네. 그렇게 판자에 모든 말씀을 새겨 넣었다네. 그렇게 새겨 넣은 판자가 오래 보관될 수 있도록 경판에 옻칠을 했다네. 목각판에 옻칠을 한 것은 팔만대장경이 유일하였지.
그렇게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은 단순히 부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이 아니었다네. 고려의 혼과 총력이 담겨있고 나라를 위하는 간절한 마음과 숭고한 믿음이 함께 불어넣어진 것이지.
어떤가. 무려 5천 2백만 자가 넘는 글자를 목판에 일일이 새겨 넣었을 때의 심정이. 느껴지는가.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하지만 그때 외부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우리 민족의 혼을 하나로 이어주던 그 염원을 헤아리는 사람은 없는 것 같더군.
그저 팔만대장경과 함께 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에 답이 없는 메아리만 고요하게 울릴 뿐이지.
언제부턴가 어색한 사이를 메우는 공간이 문화예술의 공간이 되었을까?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 미술작품을 보면서 작품을 바라보는 안목을 확인하고 취향이 우회적인지 노골적인지를 확인한다.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문화를 나누고 한숨을 돌린다.
그리고 티켓 단 두장만으로 두 사람의 마음이 움직일 수 공간이다.
“효진씨,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오늘 저녁이요? 야근만 없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데 왜요?”
“다른 건 아니고, 저한테 뮤지컬표 두 장이 생겼거든요. 혹시 안보셨으면 같이 보실래요?”
“우와, 그거 엄청 빨리 매진 된 거라 구하기 힘든 건데. 갈래요!”
민수는 효진이 일하는 곳 상사이다. 효진이 이곳에 입사한 후로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민수의 컴퓨터 모니터로 효진이 보낸 매신저가 날아왔다.
‘대리님! 이따 퇴근하고 정문 앞에서 봬요. 저녁은 제가 쏠게요^^’
민수는 그 메시지 하나로도 충분했다. 어렵사리 친구놈에게 구걸하다시피 표를 산 것이, 거의 표 두 배 가격을 주고 산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순간이었다.
모처럼 칼퇴를 하고 나서니 멀리서 효진이 보였다. 하늘높이 손을 들어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고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효진은 정말 보고 싶던 뮤지컬이었다며 재차 기쁨을 표했다. 공연이 끝나고 둘은 근처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서울의 밤은 여전히 화려했고 잠들지 않았다.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공연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공연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했고 그중에 효진과 민수도 속해있었다.
효진은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더니 화려하게 반짝이는 불빛을 보면서 말했다.
“가만 보면 서울은 참 희한한 동네인 것 같아요. 동네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만.”
“어떤 점에서?”
“음,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잖아요. 이렇게 건물들에 불이 켜져 있는것도 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일 테고. 그런데 그 속에서 이렇게 숨 좀 돌려보겠다고 공연도 보고 미술도 관람하고 하는 걸 보면 참 딱해요. 서울사람들도.”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러네. 서울이라는 동네가.”
“그렇죠? 서울에 야경이 멋있다는데 보면 다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인데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해요.”
효진은 자기감정에 취해있는 듯했다. 회사에서는 효진과 특별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음으로 효진의 생각과 가치관을 들어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그냥 어린 신입사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꽤 진지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아서 속으로 살짝 당황스러웠다.
효진은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취기가 올라서인지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공연의 흥분감이 채 가시지 않아서인지 효진의 두 볼이 약간 발그레 했다.
“전 예술의 전당이 참 좋아요. 여기에선 숨통이 좀 트인 달까? 친구와도 좋고 연인도 좋고 가족도 좋고. 누구와 와도 좋은 곳인 것 같아요. 지금 우리처럼 직장 상사와도 좋고!”
효진은 빙그레 웃었다. 효진의 말대로 서울의 문화 예술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의 전당은 그랬다. 누구와 와도 즐거운 곳이었다.
민수는 겉옷을 벗어 효진의 어깨에 슬며시 걸쳐주었다. 효진도 나쁘지 않은 듯 배시시 웃었다. 예술의 전당에서는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저녁 오페라 공연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희미한 노랫소리에 맞춰 예술의 전당 앞 분수가 춤을 추었다. 분수에 오색빛이 비춰지자 환상적인 느낌을 연출했다.
효진이 자그마한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희미한 노랫소리 그리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반짝이는 서울의 밤은 그렇게 잠들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졌던 월미도는 연인들의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노르망디상륙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이라고 불리는 인천상륙작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 나는 자연스레 다시 이곳을 찾았다.
어머니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셨던 아버지를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발생한 여덟 명의 전사자 중 한 분은 아니셨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으셨지만, 전쟁에 대한 후유증으로 힘들어 하시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전쟁이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전쟁을 회상하시면서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으셨다.
“네가 그 자랑스러운 분의 딸이란다.”
어릴 때부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의 어머니는 항상 환하게 웃고 계셨다.
문득 십 년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에는 너무 무거운 분위기의 기념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큰애인 미현이도, 작은 애인 미정이도 여기저기에 자리한 총을 든 군인들과 탱크들의 모습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울먹이며 보채는 어린 딸들 때문에 기념관을 자세히 둘러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아이들도 대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 그런지 사뭇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런 딸들을 보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라면, 참전자의 가족들은 이곳에 와서 울음을 터뜨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아이들도 전쟁을 피부로 겪어 본 세대는 아니었다. 나조차도 이곳에 있는 전쟁의 기록들이 어렵기만 한데, 딸들에게는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유월 이십오 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단체로 관람을 온 아이들이 많았다. 원복을 입고 노란 가방을 멘 유치원생들은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물이 글썽해진 아이도 있고, 친구의 손을 꼭 잡은 아이도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상하기만 한 일인 것 같았다.
“선생님! 전쟁이 또 일어나면 어떻게 해요?”
흑백으로 찍힌 전쟁 사진들을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질문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스쳐 지났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나조차도 전쟁은 먼 나라의 이야기 같게만 느껴지는데 말이다.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 이야기를 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교과서를 통해, 방송을 통해 전쟁 이야기를 접할 때에도 눈물이 나기는커녕 ‘아, 저런 일이 있었구나. 잊지 말아야지.’하는 단편적인 감상밖에는 들지 않았다. 유월이 될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쓰는 말인 ‘호국영령’ 중 한 명이 바로 우리 아버지인데도 말이다. 몇 십 년이 지난 뒤에 내가 죽어 아버지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 아픔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해야 할 텐데 그것이 너무 어려웠다.
야외 전시장을 지나 기념관을 나서려는데 미정이가 나를 불렀다. 딸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벽을 오르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한 청동상이 있었다.
“엄마, 이것 좀 봐요. 이 중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있을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어찌 할 수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 어머니의 얼굴 대신, 부엌에서 숨을 죽여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아픔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야지. 그동안 당신 힘들었던 거 알아. 누구보다도.”
이제는 원망이나 설득을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원망이나 설득의 마음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남편이 마음을 돌려주기를 내심 바라는 마음은 있다. 홧김에 한 말이었다고 그냥 다시 예전처럼 지내고 싶다고 말해주길.
“연락 자주 할게. 아이들 데리고 자주 내려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하는 남편이다. 일주일 전만 해도 화를 내고 시부모님께 일러보기도 하고 협박까지 했던 아내였기에 남편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남편은 안정된 직장에서 남부럽지 않은 연봉에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가정에서는 집안일도 잘 도와주고 아이들이라면 끔찍이 아끼던 최고의 가장이었기 때문에 남편의 선택을 받아들이기가 더욱 힘든 아내였다. 생활비 한 번 허투루 쓴 적 없는 모범답안과 같던 남편이 돌연 귀농 생활을 통보한다. 처음에는 권유였으나 나중에는 혼자라도 가겠다고 통보를 한다.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묵묵히 함께 살아온 30년. 아이들을 다 키워놨다고 생각해서일까. 일주일간 아내는 잠도 제대로 못 들고 남편의 생각을 읽으려 노력했다. 도저히 모르겠다. 무슨 영문인지.
생각에 변함없음을 알리는 남편의 대답에 이젠 이런 실랑이도 소용이 없음을 받아들였다.
결국, 남편은 홀로 횡성으로 떠났다. 예전의 남편이라면 아내가 싫다고 할 때 마음을 접었을 것이다. 고집불통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싶은 생각도 든다. 무작정 우겨 내려온 것이지만 단출한 살림에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귀농 생활이었다. 일단 무작정 장에 가보기로 한 남자는 우연히 소 한 마리를 얻어 기르게 되었다.
큰 눈을 껌벅이는 소를 바라보니 어릴 적 남편과 닮았다. 남편은 큰 눈에 겁이 많아 소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소와 남편은 닮은 점이 많았다. 큰 눈을 껌벅이며 남편을 바라보는 것이 이 녀석과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논농사를 지을 것도 아니고 특별히 밭을 갈 일도 없는 남자였지만 남편은 소를 애지중지 키웠다. 아내가 바라보았다면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
귀농 생활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잡을 즈음 아내가 왔다. 아내는 오자마자 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마당에 자리 잡고 있는 소를 바라본다. 이젠 소까지 키우느냐며 농사꾼이 다 됐다고 웃는다. 아내가 오랜만에 웃는다.
아내도 자신이 빙긋 웃는 것이 어색했는지 슬쩍 말을 돌린다.
“혼자 피죽도 못 얻어먹고 사나 했더니 제법 살림꾼 다되었나 보네. 딸린 식구도 있고. 하긴, 횡성 하면 한우지. 이 소는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거야?”
아내는 겁이 많고 큰 눈을 껌벅이는 소를 향해 잡아먹으려고 기르는 거냐며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아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소여물을 다듬었다. 하지만 아내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거야?
소를 끔찍이 생각하던 횡성사람들이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점점 줄고 소들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로 접어들자 횡성사람들은 소를 식용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에겐 여전히 소는 가족과 같은 존재이다.
아내가 돌아갔다. 아내는 은밀히 여기 내려와서 같이 지내는 것도 괜찮겠다고 이야기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물론 함께 지내는 것이 더 좋을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남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큰 눈을 껌벅이는 소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유리씨, 괜찮겠어? 오를 수 있겠냐고.”
걱정인지 귀찮음인지 모호한 어조로 말하는 팀장의 목소리에 괜히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럼요. 피해 안 가도록 천천히 뒤따라갈게요.”
팀장은 대답을 다 듣긴 한 것인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찬바람을 남기고 다른 팀원에게로 가버렸다. 가까스로 참고 있는 눈물에 손과 발이 미세하게 떨렸다. 팀장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자칫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져 남은 사람들에게 그동안의 삶처럼 짐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유리는 선천적으로 하반신 근육과 뼈가 약해 약한 충격에도 쉽게 부러지곤 했다. 그래서 다섯 살 때부터 그녀의 엄마는 언제나 괜찮겠어? 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래서 그녀는 남들 한 번씩은 다 타본 자전거도 타본 기억이 없고 그 나이 때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다 해본 고무줄놀이 한번 못해봤다. 사실 해볼 생각도 못 해봤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인 운동회 날의 기억을 묻는다면 사실 나는 즐거웠지만 엄마는 오히려 엄마가 학교에 말해 줄 테니 학교에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했다.
그런 재미없는 학창시절을 보낸 뒤 직장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그녀다. 어릴 적부터 늘 고민이면서 꿈이었던 문제가 드디어 터진 것이다.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갖는 첫 워크숍을 치악산으로 온 것이다. ‘악’이 들어가는 산은 바위로 이루어져 산세가 험하여 건장한 남자들도 힘들다고 한 것쯤은 유리도 안다. 그래서 엄마는 물론 팀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우기고 우겨 따라가겠다고 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을 되뇌어 왔지만 사실 그녀도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따라오면서 그녀가 생각한 것이 있고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워크숍을 따라 오기로 작정한 후 줄곧 생각한 것이 있다. 바로 코끼리와 말뚝 이야기이다.
서커스에서는 작은 코끼리를 어렸을 때부터 말뚝에 메어둔다.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아기 코끼리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자란 코끼리는 나뭇가지만 한 말뚝을 충분히 뽑아내고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코끼리는 어렸을 때부터 불가능 할 것이라고 되뇌어왔기 때문이다.
다시금 팀장이 내게로 왔다.
“유리씨. 유리씨가 간다고 하니까 말리지는 않을게. 근데 유리씨도 참 유별나다. 남들은 오르기도 전부터 힘들다고 저렇게 울상인데 굳이 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뭐야?”
“말뚝에서 좀 벗어나 보려고요.”
유리는 발가락을 잠시 꼼지락거려본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나도 어쩌면 자전거도 타고 고무줄놀이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어 놓은 한계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드디어 한 걸음 발을 떼어본다. 어쩐지 발이 가볍다.
어쩐지 아침부터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이 자꾸만 꼬여갔다. 일정이 꼬이니 괜스레 기분까지 꼬이는 것 같았다. 일정이 꼬이는 것이 남자친구인 민준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살은 자꾸만 민준에게로 향했다.
“그러게 조금만 서두르자니까. 점심도 그냥 밖에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 게 많은데 굳이 싸오겠다고 해서 이게 뭐냐?”
말이 조금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에서 부글거리는 못된 세모마음이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냐. 밖에서 먹는 밥은 조미료 투성이라 맛없다며,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김밥도시락 만들었더니. 그만하자. 여기까지 나와서 이게 뭐하는 거야. 일단 레일바이크는 시간을 두 시간 반 정도 미뤘으니까 그 전에 뭐 할지나 좀 정해보자.”
모처럼 교외로 나온 나들이라 전날부터 계획을 짜며 알콩달콩하던 둘이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서로 입이 삐죽 나와 멀찌감치 걷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래도 일정의 하이라이트였던 레일바이크는 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민준에게 짜증을 낸 것이 미안했던 현지는 민준 쪽으로 가까이 걸으며 잠시 앉아 주변관광지를 검색해 보자고 했다.
“어! 여기 근처에 풀향기 허브나라 라는 데가 있는데? 사람들 올려놓은 사진보니까 꽤 아기자기 한 것이 멋지다. 다양한 체험들도 할 수 있대. 여기서 허브 구경 좀 하고 체험 하나 하면 시간 딱 맞겠다. 가볼래?”
역시나 민준은 꽤 괜찮은 남자친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으며 먼저 현지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민준은 꽤 괜찮은 물건을 싼값에 얻은 사람처럼 즐거워했다. 현지도 그런 민준의 모습에 기분이 풀려 민준이 말한 대로 풀향기 허브나라로 가보기로 했다.
입구는 생각했던 것 보다 아름다웠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햇빛도 적당히 비추었고 가까놓은 정원은 단정하게 예뻤다. 풍차며 바람개비가 어우러져 이색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허브나라는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괜찮았다. 정원에 놓인 갖가지 장식들은 동화속 세상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고 시간을 메우기 위해 급하게 찾아온 곳치고는 더 근사했다. 쭈뼛거리며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허브 구경하시게요? 모기 쫒는 허브부터 집중력을 높이는 허브까지 종류가 다양하답니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그리고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시고요.”
“아, 네. 허브 조금만 둘러보고 비누 만들기 체험을 해보려고요.”
허브 하나하나 마다 이름과 효능에 대한 설명이 짤막하게 나와 있어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전자파를 흡수한다는 천사의 눈물이나 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행운의 나무, 남천과 같은. 민준은 남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듯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허브부터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허브들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다양한 허브 종류를 보고 비누 만들기 체험을 했다. 비누 원료에 천연 색소와 허브향을 넣고 귀여운 틀에 부운 뒤 굳혀주기만 하면 완성되는 것이라 어렵지도 않고 간단했다. 어쩐지 손에 허브향이 가득 배어있는 듯했다.
함께 만든 허브비누를 들고 레일바이크를 타러 향하는 길목에 어쩐지 자꾸만 미소가 번졌다.
“우리 오늘 일정은 다 꼬였는데 어쩐지 가끔은 이렇게 뜻하지 않은 여행도 재미있는 것 같아.”
“그러게.”
마주잡은 두 손에서는 은은한 허브향기 번져나갔고 여행의 막바지를 향해 가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행복함이 번져나갔다.
편안한 차림을 한 청년들이 모여 있고 그 속에는 유난히 흰 피부를 가진 민규가 눈에 띈다. 소풍이라도 가듯이 청년들은 삼삼오오 한껏 들뜬 표정을 하고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농활을 가는 길이다. 대학졸업을 위해 더 자세하게는 학점을 위해 떠나는 농촌봉사활동이다.
민규에게 시골이라는 공간은 이국의 어떤 사원만큼이나 낯선 공간이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댁 모두 서울이었다. 그래도 민규는 할머니댁 간다는 말을 시골에 간다는 표현으로 쓰곤 했다. 다른 애들처럼.
도시에서만 자란, 민규와 친구들에게 농활은 그저 졸업장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고 친구들과 떠나는 2박 3일 MT쯤으로 여겼다. 그저 적당히 물이나 주고 돌멩이나 고르다 오면 그뿐, 맑은 공기 마시며 힐링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버스에 오른 민규였다.
뻥 뚫린 고속도로에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원활한 소통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김제. 내리자마자 코끝에 불어오는 풀냄새와 꽃향기가 느껴졌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가을에 황금빛을 띠며 자랄 벼를 위해 논에 물을 대고 잡초들을 뽑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농활이었다. 쪼그려 앉아 몇 시간씩 고된 농사일을 하다 보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일은 해도 해도 끝날 줄을 몰랐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들던 청년들은 점점 말수가 줄었고 긴 한숨 소리만 정적을 메웠다.
때마침 반가운 새참시간. 학생들은 환호했고 민규도 뻣뻣해진 허리를 모처럼 폈다. 우두둑 소리가 났다. 새참은 파전에 막걸리였다. 민규가 무리의 끄트머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파전을 먹었고 이제야 시골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중간을 만난 듯했다.
“힘들지?”
진 초록색 모자를 쓰신 할아버지께서 민규 옆자리에 앉으셨다. 아마 이장님 댁 할아버지이신 듯했다.
“아닙니다. 허허. 저희는 그래 봐야 이틀인데요. 뭐.”
민규는 저도 모르게 이틀이라는 시간을 단정 지었다. 이틀, 그 이상은 봉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통보처럼 들리기도 했다.
“젊은이들은 모를 거야. 쌀이 어떻게 나오는지. 교과서에서 배웠을지 모르겠지만…. 쌀 한 톨 귀한 줄 알아야 해. 요즘은 산업이다 공업이다 성공의 잣대가 최첨단으로 흐르고 있지만 그 뿌리는 농사다 이거지. 허허”
할아버지는 젊은이들을 앉혀놓고 괜한 잔소리가 아닌가 싶어 끝에 웃음을 흘렸다.
쌀이 어떻게 출하되는지는 민규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할아버지 말대로 민규는 교과서에서 모내기부터 추수까지 나름대로 자세하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런데 교과서에는 벼가 쌀알이 되기까지 농민들의 이야기는 한 글자도 언급되지 않았음을 안다.
“우리나라가 농경사회가 아니겠어.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는 거지. 밥을 먹어야 힘이 나는 거야. 알지? 옛날에는 그저 한해 농사만 잘되게 해달라고 빌었으니까. 바랄 것이 그뿐이었던 시절이 다 있었으니까.”
할아버지의 말씀에는 앞뒤 문맥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으나 이해를 못 할 만큼은 아니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해가 지니 금방 어두컴컴해졌다. 시골이라 그런지 8시만 되어도 새벽녘처럼 깜깜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만이 환한 빛을 비출 뿐 서울에서 보던 화려한 불빛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늘은 잠이 잘 올 것만 같았다. 피곤해서 그럴 것이다.
이틀뿐이라던 시간은 흘렀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른 민규는 약간은 검게 그을었다. 건강해 보였다. 고속도로는 여전히 소통이 원활했다.
서울은 여전히 높고 화려한 건물들로 가득했고 번쩍이는 네온사인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8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민규는 갑자기 어지러웠다. 잠시 찾아온 현기증 정도로 여겼다.
3학년 첫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새 여름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시간이 금방 흐를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빠를 줄은 몰랐다. 이제는 정말 진로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텐데, 심리학도, 철학도, 경영학도, 심지어는 예술분야까지,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막막한 마음에 일단 부모님과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부터 열심히 하려 했던 것이 오히려 결정을 미루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냐마는, 이대로 있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져 간다. 날씨가 더워지며 점점 머리에도 열이 올랐다.
며칠 전 밤을 새워 모의고사 준비를 하다 코피를 쏟고 만 이후로, 안 그래도 느긋하신 성품의 부모님은 딸 걱정에 어쩔 줄을 몰라 하시고 있다. 보약도 지어 오시고,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나 쿠키 종류를 사다 주시기도 하시지만 머리가 식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민해 보라는 부모님의 말씀이 내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부모님의 말씀대로 고민할 시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수능도, 대입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수연아, 그러지 말고 이번 주말에 물놀이라도 가는 게 어때? 날씨도 많이 더워졌잖아. 엄마가 좋은 곳을 알고 있는데, 아마 수연이도 정말 좋아할 거야.”
“그래, 수연아. 네 엄마도 나도 정말 걱정이다. 더위도 식히고, 머리도 식혀보자.”
이쯤 되면 거절하는 것도 참 애매하다. 나는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방으로 들어와 오답정리를 시작했다. 거실에서 부모님이 주말의 일정과 준비해야 할 물건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내게는 이 생각뿐이었다.
물놀이를 간다고 해서 막연하게 바다나 강가를 상상했는데, 도착한 곳은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계곡이긴 한데, 여기저기 예술작품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부모님이 돗자리를 펴시고 튜브에 바람을 불어넣는 동안 나는 정신없이 예술작품들을 구경했다. 물가에는 <돌꽃>이 피어 있었고, 안양 종합 운동장에서 옮겨왔다는 잔디밭에는 <잔디밭은 휴가 중>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안양에 ‘예술의 도시’라는 슬로건이 붙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독특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물고기의 눈물이 호수로 떨어지다>라는 이름을 가진 분수를 지나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큐브>였다. 나는 이 두 개의 철제 상자 사이에 턱을 괴고 쪼그리고 앉았다. 두 개의 상자는 내가 선택해야 될 미래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감옥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한 가지 작품을 보고 미래와 감옥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단어가 떠오른 것이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했다.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두 개의 상자를 만들며 작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금 미래를 선택한다고 한들, 나는 자유롭게 내 미래의 문을 여닫을 수 있을까.
문득, 내 자신이 내 미래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개의 큐브 중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큐브 밖에 있는 내 자신이 내가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닐까.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맛있는 점심이 준비되어 있었다. 부모님과 나란히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불현듯 담임선생님께서 추천해주셨던 자유전공학부 제도가 떠올랐다. 학부로 대학에 입학해 다양한 학문을 접해본 뒤 2학년이 될 때 세부 전공을 선택하는 제도였다. 대학에 입학하면 또 취업 준비로 바빠질 텐데 괜히 소중한 일 년을 허비하는 것 같은 생각에 거절했었지만, 예술 공원을 한 바퀴 거닐며 갖가지 관점의 상상력을 접한 나는 내게 1년의 시간을 더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자니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양 옆에 앉으신 부모님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나, 생각보다 시간이 많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