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참 좋아하는 소리들 몇 가지가 있다. 보글보글 끓던 어머니의 된장찌개 소리, 지글지글 삼겹살이 익는 소리, 뎅그렁 하는 풍경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몽돌해변의 자갈 소리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던 사람들이 ‘엥?’하며 반문해 오는 것이 바로 이 마지막 소리. 몽돌해변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야, 너희들이 해변을 몰라서 그래. 해변 그리라고 하면 모래사장만 그리지? 이 형님이 알고 있는 해변은 말이야…….”
말 그대로 주변에는 의외로 모래로 덮인 해변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한 번 빠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것이 바로 이 몽돌해변, 그 중에서도 몽돌들이 파도에 구르면서 나는 자그락자그락 하는 소리다.
나는 몽돌해변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천 년대 초반, 아이들은 아직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매일 방과 후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몽돌 위를 달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렸을 때에는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뭐든 재미있다는 말이 맞다. 예쁜 색의 몽돌을 찾는 것도, 제일 큰 몽돌을 찾아오는 것도, 똑같이 생긴 몽돌을 찾는 것도 모두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다.
그런데 해가 넘어가기 시작해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여전히 몽돌해변에 있었다. 다른 지방에서 장사를 하셨던 부모님은 노을이 다 진 뒤에야 돌아오셨다. 혼자 집에 있는 게 무서웠던 깡마른 초등학생 꼬마는 몽돌해변에 앉았다.
자그락자그락, 파도가 몽돌 새를 스치며 묘한 소리를 냈다. 쌀을 씻는 소리 같기도 하고, 조개껍질이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몽돌 위에 누워, 나는 한참이나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은 몽돌해변으로 가자.”
여름방학을 맞아 여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모인 것이었는데, 난데없는 추억 얘기가 길어졌다. 머쓱해진 나는 ‘달궈진 모래에 몸을 파묻는 장난은 칠 수 없겠지만, 따뜻한 몽돌 위에 누워 있으면 온돌 침대가 따로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자! 재미있겠는데? 나도 정동진이나 해운대 같이 예쁘기로 소문난 해변은 많이 가 봤는데, 몽돌해변은 한 번도 안 가봤어.”
그런데 내 얘기에 빠져 있던 친구들이 모두 오케이 사인을 보내 왔다. 몽돌해변이 뭔지 모르는 친구들이 절반은 됐는데, 몽돌해변에 가 본 친구들이 줄줄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앉은 자리가 몽돌해변 이야기로 들썩였다.
“몽돌이면 조약돌 같은 거지? 이름 정말 예쁘다. 돌 하나 주워 와도 돼?”
“당연히 안 되지, 임마. 너 같은 사람들 때문에 해변이 없어지는 거야. 대학생씩이나 돼 가지고 자연 망칠 생각부터 해?”
독설가로 소문 난 영민이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해서 얼떨결에 몽돌해변에 가 보게 되었다.
울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깜빡 잠이 든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오렌지 빛깔의 노을과 흑진주 같은 몽돌 사이에 누워 하루의 마지막 볕을 쬐고 있었다. 자그락자그락, 아이들의 작은 발이 몽돌 위를 달린다.
어디선가 ‘현규야, 밥 먹자!’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 목소리도, 몽돌의 온기도 아주 따뜻했기 때문에 나는 꿈속에서 또 잠이 들어버렸다.
다섯 살 이후로 녀석은 줄기차게 동생 하나 낳아달라고 졸라댔다. 생일은 물론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에도 녀석의 1순위 선물은 줄곧 동생이었다. 유치원에서 어떤 친구가 동생자랑을 했나보다. 그렇게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뒤로하고 동생소리부터 나오는 것을 보니 하나 낳아주면 좋으련만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 들기도 했다.
우리 부부가 철저한 계획아래 아이 하나를 키우려는 것은 아니었다. 몸이 약한 아내는 자궁벽이 약하여 착상이 잘 안되어 임신이 힘들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어렵게 첫아이를 임신하였으나 기쁨도 잠시 얼마 안 되어 유산을 했다. 아내는 첫 아이를 그렇게 보낸 마음에 절망감이 심했는지 몸이 더욱 약해져있었다. 그리고 2년 뒤 지금 나를 똑 닮은 이 녀석을 낳았다. 사실 워낙 임신가능성이 희박했었고 한 번의 유산을 경험한 터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기적적으로 아이가 생겼고 우리는 더할나위없이 기뻤다. 그런데 이러한 속사정을 알리 없는 요 귀여운 악당은 그렇게 엄마를 졸라댔다.
“아빠! 나 오늘 유치원에서 희망편지 썼는데 보여주까?”
“그래, 보여 줘봐. 뭐라고 썼어?”
“음. 다음 주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산타할부지한테 편지쓴고야.”
“보자, 또 동생 가지고 싶다고 썼어?”
“아니!”
“그럼?”
“음. 엄마가 안 아파서 동생 생길 수 있게 해달라고.”
이 녀석 꽤나 혼자 외로운가보다. 주말이나 틈틈이 놀아준다고 했는데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모양이었다.
다음날 이 녀석을 위해 귀여운 진돗개 한 마리를 분양받았다. 충성심이 강하고 사람과 친밀도가 많은 성격을 가졌다고 해서 특별히 진돗개로 정한 것이다.
“짜잔! 아빠가 우리 동민이 동생 데려왔다.”
“우와, 강아지다.”
“귀엽지? 얘는 진돗개야. 동민이가 귀여운 이름도 지어주고 동생처럼 잘 챙겨줘야해. 밥이랑 물도 챙겨주고 알았지? 그리고 아무데나 오줌 싸면 동민이가 치워줘야 해. 할 수 있겠어?”
“그럼. 당연하지. 헤헤. 이름은 음~ 진도로 할래. 진도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그냥 진도라고 불렀을 거 아니야. 그래서 그냥 진도라고 불러줄래.”
“그래. 앞으로 진도 잘 돌봐야해. 알겠지?”
“네!”
그날 이후로 녀석은 진도를 친 동생처럼 귀여워했다. 물론 모든 동물을 좋아하는 성격이긴 했어도 진도는 더욱 각별하게 여겼다. 유치원을 가기 전에도 진도와 떨어지기 싫다며 유치원에 진도를 데려가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아내와 한참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유치원에서 돌아올 때면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와 당당하게 동생이라고 소개시킨 적도 있다. 다행히 동민이가 진도와 잘 지내며 혼자 있는 시간에도 외로워하지 않았다.
형아가 되었다며 한결 씩씩해졌고 의젓해졌다. 진도가 지정된 곳에 볼일을 보지 않고 아무데나 배설을 하면 진도의 손을 잡고 타이르기도 했다 야단을 치기도 하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진도는 생각보다 쑥쑥 자랐다. 잘 놀고 잘 먹어서 그런지 몸집도 동민이 만해졌고 진도가 아기 때 사준 폭신한 집도 이제는 진도에게 너무 작았다. 아파트에서 몸채가 큰 개를 키운다는 것이 무리였던 것이다. 동민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도무지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당이 있는 작은 주택을 구하려고 해도 집이 팔리지 않은 상태에서 시기가 맞지 않아 약 한달 정도는 떨어져 지내야 한다고 했다. 동민은 그렇게 잘 따르던 진도를 잠깐 동안이라도 떨어져 있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일단은 동민이 유치원을 간 사이에 진도를 분양받았던 곳에 몇 주 정도만 맡겨놓기로 했다. 그 사이에 집을 알아보려던 참이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동민은 울며불며 진도를 찾아다녔다.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울면서 진도를 찾았다. 예상하던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차에 동창생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집을 보러 와도 되겠냐는 연락이었다.
드디어 우리 네 식구가 한 자리에 있을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기쁜 마음에 얼른 동민이를 차에 태우고 진도를 데리러 갔다.
진도야 진도야. 나 왔어. 형아 왔어!
진도야 진도야, 이제는 우리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돼!
진도도 꼬리를 반갑게 흔들었다.
깊고 깊은 바닷속에서 쏙 하고 바다사자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밉니다. 맑고 깊은 섬 독도에서 사는 강치는 누구보다 용감하고 호기심 많은 바다사자이지요. 늘 쾌활한 성격으로 동해를 마음껏 누비고 다녔지요. 아름다운 자연과 맑은 물이 흐르는 독도를 강치는 너무나 사랑하였어요, 이곳에는 강치와 함께 독도를 누비는 친구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강치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어요. 그건 바로 갑자기 독도 바다에 나타난 낯선 사람들 때문이었지요. 어느 날부턴가 이들은 무서운 모습을 하고 강치와 강치 가족들은 위협했어요. 그물을 던져 강치 가족들을 잡으려고 했고 무섭게 총을 쏘기도 하였지요. 평화롭던 동해외딴 섬 독도에 검은 구름이 드리워졌지요. 강치의 부모님은 낯선 사람들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다 크게 상처를 입게 되었고 결국 강치 홀로 머나먼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강치는 가족들과 함께 독도에 살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독도에 있는 오징어와 명태, 꽁치 등의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너무 슬펐지요.
눈물을 머금고 독도를 떠난 강치는 거친 파도와 맞서 싸우기도 하고 배고픔과 추위와의 싸움에 견디기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독도에서의 삶이 너무 그리워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홀로 머나먼 바다로 떠난 강치는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과 또 사람들이 자신을 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더 깊은 물속으로 꽁꽁 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바위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거북이 할아버지의 목소리였습니다.
“얘야. 넌 누구니? 못 보던 아이인 것 같구나”
“누.. 누구세요? 저는 동해에서 온 강치라고 해요.”
“네가 강치로구나!”
“네, 저를 아세요?”
“흐음. 오징어와 명태가 한참 찾으러 다니던 게 바로 너였어. 네 이름을 부르며 한참을 맴돌다 돌아가는 것 같더구나. 아마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게다.”
거북이 할아버지에게 연신 감사하다고 하며 강치는 이곳까지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와준 친구들을 생각하며 다시금 용기를 내어 독도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제 돌아가게 되면 다시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요. 예전에 씩씩하고 용감하던 강치의 모습으로 말이에요.
그렇게 빠르게 헤엄을 친 강치는 드디어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치야! 보고 싶었어. 네가 떠난 뒤 난 하루도 널 잊은 적이 없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너희 모두. 매일 이곳에서 너희와 함께 지내는 꿈을 꾸었다니까.”
“강치 네가 떠난 뒤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 갑자기 착한 사람들이 나타나 못된 사람들이 너희 가족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고 지금도 이곳 독도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어.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우릴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해.
특히 모두 너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어. 강치야.”
그렇게 독도로 돌아온 강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어 더없이 행복했지요.
오징어는 강치에게 울릉도에서 온 친구들을 소개해주고 독도와 울릉도를 찾는 많은 사람들 덕분에 더는 외롭거나 슬프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강치는 다시 독도로 돌아와 웃음을 되찾게 되고 용감하고 쾌활한 독도지킴이가 되었답니다.
나는 지금 마른 풀을 엮어 만든 움집 앞에 있다. 거대한 버섯을 말려둔 것 같은 모양의 움집 안에서, 금방이라도 온몸에 진흙을 묻힌 원시인 하나가 기다란 창을 들고 나올 것만 같다. 움집 안에서는 바싹 바른 여자 하나가 떨고 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곰이 나타날 것만 같아서 말이다.
“엄마, 다른 데로 좀 가자니까요? 나 숙제하려면 사진 많이 찍어야 한단 말예요.”
옆에서 아들이 몇 번이고 옷을 당기는데도 나는 그 움집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남편과 함께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시간과 운명의 인과관계를 다룬 영화였는데, 다른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우울증에 걸린 여주인공을 지키는 주인공의 모습이, 곰으로부터 아내를 지키는 원시인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원시 복장 차림의 여자에게 이제는 곰이 없다고 되뇌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오래도록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제, 초등학생인 아들이 기행문을 써야 한다며 나를 졸랐다. 가까운 곳에 무엇이 있나 보았더니, 하필이면 그게 또 선사유적지였다. 나는 영화 속의 그 장면이 꿈에도 나오더니, 이제는 내가 선사유적지를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원시인과 내 사이에 운명의 끈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했었다.
아들이 다시 내 옷자락을 당겼다. 알았어, 알았어. 나는 못이기는 체 걸었다.
아들을 낳고, 나는 꽤 길게 산후우울증을 앓았다. 눈앞에 내 몸에서 나온 아이가 있는데도 몸속이 비어버린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울고, 짜증을 냈으며, 사소한 일로도 남편과 크게 싸웠다.
몇 년이 지나, 우울증은 모두 나았지만 나는 남편을 잃었다. 그 동안 쌓여 온 앙금을 쉽게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오겠다던 남편은 두 달이 넘게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남편이 어디 있는지 찾으려 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없는 곰을 두려워하며 움집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내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아들은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처음 보는 원시인들의 모습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움집 앞 여기저기에 사냥 도구를 만들거나, 잡아 온 사냥감을 굽고 있는 모습들의 황동상들이 서 있었다.
“엄마! 저것 좀 봐요!”
아들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무 막대를 들고 남자에게 사냥법을 배우고 있는 어린 원시인의 모습을 한 황동상이 서 있었다. 아들은 바닥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더니, 그 모습을 똑같이 흉내 내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했다.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댔는데, 남자 원시인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자 원시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이란 어쩌면 저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한결같은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먼 옛날, 선사 시대에 살았던 나도 움집 안에 웅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나는 이제 곰을 두려워하지 않아.’라고 의미 모를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보낸 문자였다. 잠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는 휴대전화에 찍힌 정다운 발신자명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남편이 문자 한 통을 보내왔다. 나는 남편의 문자를 보고 울었다. 나는, 나의 움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셋이 모이게 된 것은 청년창업지원센터에서였다. 청년창업지원센터는 지속적인 청년실업의 돌파구를 찾아 남들과 다른 차별화 전략으로 개인 사업을 벌이는 청년들이나 초보창업자들을 위한 지원을 해주는 곳이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포장마차, 치킨 집, 카페 등 개인마다 꿈꾸는 창업 아이템도 달랐다.
사실 말이 좋아 청년CEO지 사업을 벌이는 것에서부터 경영, 재무관리, 물품관리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1인 창업보다는 두세 명이 동업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는 유기농 채소가게를 준비했고 나와 동갑인 현우는 정육식당을 우리보다 두 살 어린 성호는 퓨전음식점을 준비했다. 우연히 같은 설명회를 듣고나온 우리는 나이가 비슷했고 동지라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급격히 가까워졌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공유했다. 우연인지 우리는 음식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시장조사나 원재료에 대한 생각들을 공유하며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현우는 장흥으로 재료조사를 가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목도모도 다지고 창업성공을 위한 자축쯤으로 셀프 엠티를 다녀오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모두 그러마했고 든든한 동지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한층 마음이 가벼워졌다. 혼자서는 막막하던 일이 누군가와 함께 걷고, 어울려 걷는 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외롭지 않았다.
각자 시장조사와 재료공수에 대한 일정을 마친 우리는 슬슬 몰려오는 피로감을 느꼈다. 숙소로 돌아가려 차에 오르는데, 성호가 이왕 여기 까지 왔으니 관광 온 셈치고 장흥삼합에 소주한잔 걸치고 가자는 제안을 했다. 다들 배도 고프고 알코올 생각도 있던 차라 성호의 제안대로 장흥삼합집으로 갔다.
음식점 앞에는 대문짝만하게 TV 프로그램에 나온 맛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장흥에 온 사람이라면 꼭 먹고 간다는 장흥삼합은 장흥의 3대 특산물인 한우, 표고버섯, 키조개를 함께 구워 깻잎 등에 싸먹는 요리였다. 셋이 둘러앉은 자리에 세 가지의 대표 음식들이 있었다. 한우나 표고버섯, 키조개는 각각의 재료만으로도 큰 개성과 맛을 가지고 있지만 이 세 가지를 함께 먹으면 최고의 맛궁합을 내기 때문에 에 세 가지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리라.
각자 한손에는 삼합쌈을 다른 한손에는 소주잔을 들며 축복을 비는 건배를 했다.
“캬. 좋다. 이런 날도 있어야 숨통이 트이지. 안 그래?”“맞아요. 사실 창업지원강의 들으면서도 막막했거든요. 집에서는 젊은 놈이 무슨 장사냐며 다른 사람들처럼 안정적인 직장 가지면 좀 좋냐고 그러고. 근데 이렇게 든든한 형님들과 함께 하니까 두려울 게 없어요.”
“자식. 네 말이 맞다. 두려울 게 없다는 말. 사실 혼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참 두려운 일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우리 셋이 똘똘 뭉쳐있으니 세상 뭐가 무서울 게 있겠어.”
“그런 의미에서 자~ 잔채우시고 짠!”
“야야. 천천히 마셔라. 이것도 좀 먹고.”
“어! 그러고 보니까 얘네도 셋, 우리도 셋이네요.”
“한우랑 키조개랑 버섯 말하는 거야?”
“네! 잘 보세요. 이 각자의 원재료들 하나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이렇게 세 개를 하나로 어울려 먹으니까 더 큰 시너지를 만들어내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는 것처럼.”
“자식, 취했냐? 자자 마시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한참을 익어가는 불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가 침묵을 깨는 건배제의를 했다.
“자자. 뜨거운 불판은 그만 보시고. 잔을 들어주세요.”
최고의 궁합을 위해서 건배!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우연히 만난 음식들은 참 묵직한 추억을 안겼다. 기분 좋게 취한 우리는 역시 좋은 사람과 좋은 음식은 기분 좋은 시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거 아니? 거제도 해금강에는 많은 생명들이 잠들어 있다는 걸 말이야. 이건 너에게만 해주는 이야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쉿!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믿고 믿지 않고는 너의 결정이야. 하지만 듣고 나면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이야기일거야!
해금강에는 여러 바위들이 있어. 부처바위, 신랑신부바위, 조도령바위, 토끼바위, 늙은 사자바위, 미륵바위 등등……. 얼마나 많은지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도 없을 지경이라니까. 그런데 말이지. 정말 신기한 게 뭔지 아니? 사실 이 바위들은 다 살아있다는 거지. 그런데 왜 잠들어 있는 걸까? 그건 바로 십자동굴 밑에 사는 바다괴물 때문이야. 얼굴이 네 개나 달려 있는 아주 못생긴 괴물이지. 십자동굴 위에 절벽들이 커다란 덩어리처럼 보이지? 하지만 바다 속에서 바라보면 네 개로 나눠져 있어. 바다괴물이 네 개나 되는 자기 몸을 억지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처음에 바다괴물도 얼굴이 하나인 아주 아름다운 바다선녀였대. 그런데 왜 그렇게 끔찍하게 바뀌었냐고?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알고 바다를 우습게 보았기 때문이지. 결국 바다는 크게 화가 났고 거센 파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깎아내려 끔찍한 모습으로 뒤바꾸어 버렸대. 그때부터 그 선녀는 바다괴물로 불리게 됐지.
바다괴물은 끔찍한 얼굴이 되어버린 뒤로 항상 혼자였대.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그 모습이 너무나 무서워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돌이 되고 말았어. 하지만 바다괴물은 외로움을 너무 많이 타서 도저히 혼자일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모두 돌이 되어 버려도 자기 옆에 누군가를 두고 싶었대. 혼례를 올리는 신랑과 신부도, 크게 하품을 하던 늙은 사자도, 담뱃대를 물고 연기를 내뿜던 조도령도, 절벽 위 숲에 사는 토끼도 전부 다 말이지.
이를 두고 보지 못한 근처 절의 부처가 바다괴물을 찾아갔대. 못됐다고 소문난 무서운 괴물을 무찌르려고 말이지. 그런데도 바다괴물은 정말 기뻐했어. 자기의 끔찍한 얼굴 때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손님이 찾아온 거였거든. 열심히 단장을 한 거야. 하지만 못생기고 끔찍한 얼굴을 바뀌지 않았지. 바다괴물은 너무나 슬펐어.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지. 부처는 돌이 되지 않기 위해 밤에 괴물을 찾아갔어. 계속해서 울어대던 바다괴물은 부처를 보자 기뻤대. 자신의 얼굴을 보고도 변하지 않는 건 부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부처는 그런줄도 모르고 바다괴물을 힘껏 내려쳤어. 그러자 바다괴물의 몸이 네 개로 나누어져 버리고 말았지. 그리고 그 순간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어. 그때 부처는 바다괴물의 얼굴을 보고 만거지. 결국 부처조차 바위가 되고 말았대.
괴물은 돌이 되어버린 부처를 보고 슬퍼서 계속해서 울었어. 자기 몸이 네 개로 나누어진 줄도 모르고 말이야.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대. 괴물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거야.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죄 없는 생명들을 돌로 만들어버린 일에 대해서 뉘우쳤지. 그리고 그때 해가 떠올랐어. 바다괴물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얼굴이 정말 궁금했어. 끔찍한 모습으로 변한 이후에는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거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못생긴 얼굴을 봤대. 너무나 놀라 자기도 모르게 네 개로 변한 얼굴을 하나로 감싸 가려버렸대.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는 이유로 돌로 굳어버리고 말았지.
정말 신기하고도 슬픈 이야기지? 괴물이 돌이 되고 난 이후에 흙 한줌 없는 기암괴석 절벽위에는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대. 천년의 세파에도 청청히 계속해서 살아 남았대. 이 천년송은 지금 해금강의 수호송이 되었어.
하지만 정말 안 된 일이지? 바다괴물과 바위가 되어버린 생명들이 말이야. 지금부터 내가 말하려는 비밀은 바로 이거야. 그때 해와 달이 떴던 일월봉 기억나니? 일 년에 한번씩 일월봉 위로 해와 달이 뜨고 진대. 그러면 바다괴물은 아름다운 바다선녀로 잠에서 깨어난대. 그리고는 자신 때문에 돌이 된 신랑신부와 부처, 토끼, 늙은 사자, 조도령을 깨워 함께 하루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라. 무엇을 하고 놀길래 그렇게 즐거운지 누구나 궁금해할 정도로 말이지. 너도 궁금해지지? 이 비밀을 알게 됐으니 너도 일 년에 한번, 해와 달이 뜨고 질 때 그 십자동굴로 찾아가보렴. 혹시 모르니? 잠에서 깬 그들이 너를 맞이할지 말이야.
드디어 부처님 오신 날이다. 십 분만 일찍 깨워도 하루 종일 짜증을 내는 나이지만, 오늘만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분주히 움직였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불자이시지만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일 년 중 딱 하루, 부처님 오신 날만큼은 내게도 특별한 날이다. 평소에는 집 근처에 있는 절에 다니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는 초파일에만 이른 아침부터 시외버스를 타고 범어사에 가신다. 그리고 나는 몇 년 째 범어사 가는 길에 동행하고 있다.
내가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니, 오래되었다면 오래 된 이야기다. 친구와의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도시락을 싸 들고 어머니와 할머니를 따라 나섰는데, 그 곳에서 꿈속의 풍경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기마다 보랏빛 포도송이가 매달린 신비한 나라에 가는 꿈을 종종 꾸었다. 산자락 한 귀퉁이로는 맑은 샘물이 솟고, 그 안에는 자잘한 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큼직큼직한 바위들 사이로, 거대한 나팔꽃처럼 굵직한 나무줄기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는 그 모습에 반하여, 하루는 꿈에서 깬 뒤에 그 숲의 모습을 남몰래 크레파스로 그려 두었었다.
몇 년 뒤, 어머니께서 그 스케치북을 발견하시며 이 숲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스케치북을 보시고는, 어머니가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요 녀석, 여기 갔던 걸 기억하고 있네? 아주 코흘리개일 때 데리고 갔었는데.”
그랬다. 어렸을 때 할머니 손에 이끌려서 갔었던 범어사의 등나무 숲이 꿈속에 나왔던 것이다. 이어지는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연보랏빛 등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포도나무 숲이라며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었다고 한다.
“정말 괜찮겠니? 이따가 엄마랑 할머니랑 같이 가지 그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지만, 나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된 내가, 어머니의 눈에는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자꾸만 나를 돌아보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범어사로 올려 보내고,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등나무 숲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안개가 짙었다. 등나무 꽃이 구름처럼 핀다 하여, 이곳을 등운곡(藤雲谷)이라고도 부른다 하였는데 안개와 등나무 꽃이 한 군데 어우러진 모습이 정말 신비로웠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오래 걷지를 못하는 탓에 잠시 등나무 숲 한 복판에 주저앉았다.
“등나무는 지가 살려고 소나무 같이 좋은 나무를 감아 올라가서 다 죽이삔다 아니가.”
구불구불한 등나무 사이로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쭉 뻗어 있는 모습을 보자, 작년 이곳에 왔을 때 들었던 이 동네 할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나는 그 날 집에 돌아가 방문을 잠그고는 숨을 죽여 울었다.
하나 뿐인 아들, 하나 뿐인 손자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되자, 어머니와 할머니가 내 다리를 낫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셨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춘기를 겪고 있던 나는 지팡이를 짚고는 도저히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검정고시라도 준비했으면 되었을 텐데,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절망감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기만 했다. 결국 나는 대학에도 가지 못했고, 취직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에 틀어박혀 백수가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도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저 멀리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단숨에 나를 찾아내어 달려오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또 소나무 생각을 했다. 넘어지지는 않았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익살스럽게 내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내밀어 보였다.
“이 녀석이 있잖아요.”
할머니가 웃으며 끼어드셨다.
“녀석, 그 지팡이도 요 등나무로 만들었다는 건 알고 있누? 지팡이 중에서는 등나무 지팡이가 최고지. 옛날에 신선들도 다 등나무 지팡이 짚고 다녔다잖어.”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소나무를 죽이는 등나무가 아닌, 다른 이들이 짚고 일어설 수 있는 등나무가 되고 싶었다. 어렸을 때에는 포도송이처럼 보였던 등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해가 지면 범어사 안에는 등불이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저도 꽃을 피울게요, 어머니.”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끌어안고 우셨다.
배꼽이 뽈록하게 튀어나온 것 때문에 나는 어릴 적부터 별명이 참외였다. 난 참외를 보아도 내 배꼽이 생각나지 않는데 어른들은 내 배꼽이 참외에 썩 어울린다고 생각하셨나보다.
어렸을 적 동네 어르신들은 톡 하고 튀어나온 배꼽을 보고 귀엽다고 하시며 복이 있는 배꼽이니 부끄러워 할 것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참외를 보고는 항상 나를 부르시면서 참외야 이리와 봐라, ‘참외야’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 뒤에 쪼르르 숨어 있다가 방으로 콩 들어가 버렸다. 동네에서 나는 참외야로 불렸지만 나는 그 별명이 참 싫었다. 우리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 그것도 굳이 내 콤플렉스인 참외로 불리는 것은 또 무언가. 나는 동네 어르신들이 ‘참외야’라고 부를 때마다 저는 참외가 아니라 지원이에요! 라고 해도 쬐끄만 참외 녀석이라고 할 뿐, 내 이름을 불러주시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커서도 나는 항상 헐렁한 옷을 입고 다니며 배꼽을 숨겨야했다. 친구들과 목욕탕도 함께 간 적이 없다. 수학여행 때에도 아이들이 모두 씻고 잠든 밤에 뒤늦게 씻고 자는 수고스러움까지 겪어야했다.
여름이 오면 시골에서는 유난히 수박, 참외 서리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누구의 소행인지 걸리기만 해보라며 씩씩거리셨지만 범인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우리 할아버지 댁뿐만 아니라 다른 할아버지 네도 참외서리가 범인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그리고서는 나보고 참외야, 네가 훔쳐간것이 아니냐? 라고 물어보신 할아버지도 계셨다. 내가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어 봐도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마치 나를 범인 보듯 하시는 동네 어르신도 계셨다.
그러면 나는 ‘참외 싫다고요!’ 라며 소리를 꽥하고 지른 적도 있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참외가 싫었다.
아이를 가지고 배가 남산만큼 불러오니 배꼽이 더욱더 볼록하고 튀어나와보였다. 남편은 그런 내 배꼽을 보고 아이와 이야기하는 통로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항상 아이에게 말을 걸 때 내 배꼽에다 대고 이야기를 했다. 내가 배꼽에 콤플렉스가 있는걸 알면서도 그런다. 남편은 요즘 참외배꼽이 얼마나 매력 있는데 그걸 숨기냐고 능구렁이 같은 표정으로 말할 때면 나는 한참을 흘겨보고 만다. 남편은 아이의 태명을 ‘참외야’라고 지었다. 내가 질색을 했지만 남편은 귀여운데 왜 그러냐고 했다. 정말이지 내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이를 갖고 나서 심한 입덧으로 아무것도 넘기지 못할 때 그렇게 싫던 참외가 자꾸만 떠올랐다. 남편은 뭐 어려울 것 있냐고 마트에서 사다주겠다고 했지만 왠지 한입 베어 물면 생각했던 맛이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먹고 싶던 참외는 마트산이 아니라 할아버지 댁에서 밤에 몰래 서리를 해서 먹는 참외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자기야 있지, 진짜 신기하다. 내 별명이 참외였잖아. 그래서 참외는 정말이지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우리 아가 가지고 난 후부터 계속 참외가 땡겨.”
“그러니까 자기랑 참외는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니까!”
“장난하지 말구, 만약에 말이야. 우리아가도 나처럼 참외배꼽이면 어쩌지?”
“뭐 어때? 귀엽기만 할 것 같은데?”
우렁찬 소리와 함께 여자아이가 쏙하고 나왔다. 의사선생님께서는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체크하시고는 갓 태어난 아이를 내 품에 안겨주었다. 언뜻 아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녀석도 나처럼 참외배꼽을 가지고 태어났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똑 닮은 아이를 낳았다는 신기함일까 쭈글쭈글한 상태로 울어대는 아이가 나와 똑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첫 인사를 건넸다.
“안녕? 참외야, 엄마야.”